영월, 낯설지만 익숙하게

브랜드파머 원승현

아는여행|



브랜드파머 원승현

영월에서 36년간 유기농 농사를 지은 남자와 몇 해 전부터 그 옆을 지키는 아들이 있다. 아들은 아버지를 도와 토마토 농사를 지으며 농장 이름을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정신으로 유기농 농사의 대를 잇겠다는 뜻인 ‘그래도팜’. 그 김에 토마토 이름도 하나 지었다. “토마토 맛이 기똥차다, 기특하다”는 고객의 평을 듣고 생각해낸 ‘기토’다.

그저 대표할 수 있는 이름이 생겼을 뿐인데 많은 것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이제 그냥 토마토가 아닌 기토를 기억한다. 수많은 토마토 중 그래도팜의 토마토를 꾸준히 찾는다는 것, 그건 그의 아버지가 36년간 이어온 정신을 처음으로 입 밖으로 불러낸 일이다.



자기소개 부탁한다.

브랜드파머 원승현이라고 한다. 아버지를 도와 토마토 농사를 지으면서 ‘그래도팜’의 브랜딩을 함께하고 있다. 원래 디자이너였는데,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이후 패키지 디자인 쪽 일을 하다 2015년에 귀농했다.



고향이 영월인가.

그렇다. 부모님이 계속 여기서 농사를 지어 서울 생활 몇 년을 제외하고는 쭉 영월에 살았다. 완전 토박이라고 보면 된다. 어렸을 때는 이곳이 답답해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버스도 오래 걸리고, 길바닥은 흙투성이고…. 그래서 고등학교 때 엄청 열심히 공부했다. 애들이 떠들면 자제시키면서 공부하는 애 있지 않나. 그게 나였다. 공부 잘해서 빨리 떠나려고.


그렇게 원하던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가 궁금하다.

대학교 가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졸업하고 나니까 다시 시작이더라.(웃음) 회사 생활이 싫었다기보다 제가 원래부터 먹거리나 생태에 관심이 많았다. 아무래도 유기농 농사 1세대인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귀농할 마음은 늘 있었다. 다만 그 시기를 보고 있었다. 보통 귀농은 40~50대에 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때 가서 농사일을 배우려면 몸이 너무 힘들 것 같더라.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잘하는 것이 디자인이니까 좀 빨리 아버지 농사를 도우면 시너지 효과가 있겠다 싶어서 내려오기로 결심했다.


그럼 도시에서 몇 년 산 건가.

10년 좀 안 된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정말 10년이 빨리 지나갔다는 것과 나와는 안 맞는다는 점이다.(웃음) 그냥 버틴 것이다. 내가 <아일랜드>라는 영화를 서른 번 정도 봤다. 복제 인간들이 탈출하는 내용인데 일상이 답답할 때마다 봤다. 왜 그런가 했더니 남들에 의해 살아지는 입장이 비슷하더라 .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니 의외로 가까운 데 답이 있었다. 농사와 브랜딩. 요즘은 직업 소개할 때 '브랜드파머'라고 한다.


아버지가 유기농 농사를 한지 36년이 지났다고 들었다. 그러면 80년대 초반에 시작한 것인데, 당시 유기농 농사가 인정을 받았나.

그 당시에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아버지한테 시작한 이유를 여쭤봤다. 그랬더니 어머니 별명인 ‘쉬리’ 말씀하더라. 쉬리는 일급수 아니면 못 사는 어류인데, 어머니도 농약을 조금만 쳐도 몸이 아팠다. 보통 소비자들은 농약을 뿌린 작물을 꺼려하면서 사 먹는다. 사실 잘 닦기만 하면 큰 문제는 없다. 오히려 농약을 치는 사람들에게는 안 좋은 것이다. 아버지는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죽을 수는 없으니까 어머니 건강 때문에 유기농 농사를 시작하셨다. 그때는 생태적인 문제로 접근했던 것이 아니라 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도팜




많고 많은 작물 중에 토마토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우리가 삼십몇 년간 토마토만 한 것은 아니고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작물을 다 키워봤다. 토마토가 괜찮은 이유는 일단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많다. 예를 들어 무나 배추는 생산물 그 자체를 한 번에 수확하지 않나. 그런데 토마토는 한 줄기에서 열매가 여러 개 나온다.



일반적으로 유기농 농산물이라고 해서 특별한 맛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보통 건강 때문에 유기농을 찾는다.

내가 호주에 갔을 때 퀸 빅토리아 마켓이라는 곳을 구경했다. 유기농 코너도 있다고 해서 가봤는데 규모가 엄청나게 크더라. 그리고 소비 순환이 아주 빨라 보였다. 왜 그런가 했는데 먹어보니 확실히 맛이 있었다. 유기농 농산물의 가장 큰 장점은 안정성과 맛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일반적으로 유기농 농산물이 맛이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것이다. 토양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농약만 안 치고 비료만 안 준 생산물, 쉽게 말해 영양실조 상태인 농산물을 먹기 때문이다. 물론 백 퍼센트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제대로 농사하는 분이 적다 보니까 소비자들이 유기농 농산물의 맛을 잘 모른다.


사실 말로만 들어선 그래도팜의 토마토가 얼마나 맛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른 곳과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을까?

토마토뿐만 아니라 모든 농산물엔 향이 있고, 먹었을 때 식감이 중요하다. 기토 같은 경우는 향이 좀 센 편이다. 보통 토마토에 질소가 많이 남아 있으면 찝찝하고 더이상 먹기 싫은 느낌이 있다. 가끔 식당에서 후식으로 나오는 토마토는 5~6개도 채 못 먹을 때가 있지 않나. 그런데 우리 토마토는 청량감이 느껴지면서 당도가 높기 때문에 손이 계속 간다. 보통 다른 농장 토마토는 당도가 7~9브릭스인데 우리는 10~11브릭스 정도 나온다.


ⓒ그래도팜




당도 차이가 엄청나다. 이유는 무엇인가.

맛은 여러 요소에 의해 작용하는데, 그중에서도 땅에 있는 아미노산이 많은 영향을 준요. 그런데 아미노산은 필수 요소라기보다 미량 요소에 해당된요. 먹냐, 안 먹냐에 따라서 작물의 맛과 향이 천지 차이가 난죠. 일단 아미노산을 품고 전달할 수 있으려면 땅이 살아 있어야 한다.



농부의 아들로 자랐기에 얻은 특별함이 있다면?

일단은 같은 직업군이다 보니까 비교 대상이 있다.  도움도 많이 받고,  우리 집은 웬만해서 크게 싸울 일이 없다. 아버지의 일인 농업을 인정하고, 아버지는 내가 하는 브랜딩을 인정해 주고. 그러다 보니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물론 잔 싸움은 있다. 청년 농부들 얘기 들어보면 부모님이랑 같이 일 못 하겠다고 한다. 인정도 안 해주시고 고집만 세다고. 우리 아버지는 유기농 관련 상도 많이 타고 주변 사람들한테 인정도 많이 받는데도 여전히 겸손하다. 이제는 소비자들이 기다렸다가 구매하는 정도인데, 이쯤 되면 장인이라 불려도 괜찮지 않냐고 여쭤보면 “농사는 많이 지어봐야 일 년에 두 번 짓는데 그래봐야 백 번도 못 지어보고 무슨 장인이냐!”고 한다. 방망이를 깎아도 만 번은 깎아야 잘 깎는다는 소리를 듣는다면서.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운영한 지 얼마 안 돼도 잘한다는 얘기를 듣는 농장이 있으면 직접 찾아가 보기도 한다. 아버지의 유연한 스타일이 나한테 큰 도움이 된다.


잠깐 보니까 동네가 유독 조용하더라. 주변에 추천해줄 만한 곳이 있나.

가까운 곳은 아닌데 엄둔계곡이라고 있다. 어렸을 때 거기에 있는 장수바위에서 자주 놀았다. 어른들은 천렵(川獵)이라고 부르더라. 예전부터 농사일 끝나고 계곡이나 강가로 소풍 가는 풍습이 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으니까 주로 엄둔계곡으로 놀러 갔다. 조금 더 커서는 차가 없으니까 잘 못 갔고.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 문득 생각나더라. 오랜만에 갔는데 여전히 신기하게 생겼다.



ⓒ원승현


PLACE

엄둔계곡 장수바위: 강원 영월군 무릉도원면 법흥리 / 033 370 2531

장수바위는 엄둔1교를 지나면 나오는 간이화장실 옆에 있다




이따가 가보려고 한다.

지금은 겨울이라 좀 황량한 느낌이 들 것이다. 여름에는 분위기가 좀 오묘하다. 숲에 둘러싸여 있는데 미끄럼틀 같은 둥근 바위가 있고…. 지금은 인근 도시 사람들도 이곳에 대해 많이 알더라. 옛날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아놔 마을 사람이나 몰래 들어갔었다. 그만큼 숨겨놓고 싶은 장소였다. 몇 년 전 같았으면 이렇게 소개도 못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숨기고 있는데 나만 얘기하면 배신이지 않나.(웃음)


여기 오기 전에 추천해준 섶다리에 가봤는데, 그 끝에 다방이 하나 있더라. 

사실 섶다리를 처음 봤을 때는 ‘뭐 이런 걸 만들어놨나’ 했다. 그런데 지난 연초에 가족들과 함께 가보고 난 후에 생각이 좀 달라졌다. 다리를 건너서 섶다방에 앉아 차를 마시고 캠핑장에서 하루를 보내니 영월에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에서 봤을 때랑 실제로 다리를 건너보니까 느낌이 상당히 다르더라.



섶다리는 일 년에 한 번씩 떠내려간다. 섶다방 주인 아저씨가 매년 만드시는 것이다. 그래서 모양이 매번 다르다. 


PLACE

섶다리·섶다방: 판운쉼터 /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송학주천로 2141

앞에 있는 공터를 지나면 섶다리가 보인다. 섶다방은 그 건너편에 있다.

운영시간 문의 후 방문 / 장광수 010 8828 9108




다방 주인의 캐릭터가 특이하더라.

그렇다. 그분 좀 특이하신 것 같다. 다방 자체도 그렇고. 조그마한 공간인데 있을 것은 다 있고, 심지어 겨울에 따뜻하다. 따뜻한 대추차를 마신 덕분인지 난로 화력이 좋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주막 같은 분위기여서 나이 지긋하신 분에게는 추억이 되고 우리 같은 젊은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경험이 되는 것 같다.


맛집으로는 백숙집 추천했다. 

백숙집은 원래 주천면에서 가장 맛있는 자장면집을 하셨던 분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우연히 가족들이랑 가서 먹어봤는데 맛이 괜찮더라. 재미난 것은, 얼마 전부터 중식 메뉴를 추가하셨다는 것이다. 식당에 간다면 백숙보다는 본 전공인 중식을 주문하길 추천한다.(웃음)



PLACE

가마솥 식당: 강원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법흥로 316-4

033 372 9400 / AM 9:30~PM 8:00




마지막으로, 그래도팜은 어떻게 변화할까?

원래 농사를 짓고 유기농 대를 잇는 데 집중하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소비자에게 정보와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생산하는 양은 전체로 봤을 때 퍼센티지로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미미하지 않나. 그렇다면 누군가는 비슷한 질의 혹은 더 나은 질의 농산물을 만들면 좋은 것이고, 또 유기농 농사를 짓는 분들이 늘어나면 새로운 비교군이 된다. 소비자들은 자연스럽게 유기농 농산물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고.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알약 먹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산물을 먹게 될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농사지을 사람도 몇 없을 것이다. 

사실 농사를 짓는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뭔 농사냐고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해야 할 것 같아서 했는데 농사짓는 천성이 아니더라. 농부는 되게 묵묵해야 하고 혼자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하며 몸 쓰는 것도 즐겨야 한다. 그런데 저는 사람 만나서 떠드는 것을 좋아하고 반짝반짝 튀려고 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방향을 틀었다. 아버지 같은 사람이 많이 생길 수 있게 전달자 역할을 하기로 한 것이다. 젊은 농부들이 생길 수 있게, 또 소비자들이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




영월의 기억 속에서

3 SPOTS IN SEUNG HYUN’S STORY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 농부가 소개하는 영월은 과거와 지금의 이야기가 공존한다. 어린 시절 놀았던 계곡은 그의 말처럼 깊숙이 숨겨져 있었고, 최근 만났다는 섶다리 아저씨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그가 마지막으로 추천해준 백숙집이 근처에서 가장 맛있는 자장면집을 운영하셨던 분들이 만들었다는 이야기까지 알고 나서는 반 정도는 영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01 엄둔계곡 장수바위

마을 사람들만 알던 비밀 공간. 여름에 가면 바위를 미끄럼틀 삼아 타며 색다른 피서를 즐길 수 있다.


02 섶다리 & 섶다방

예전부터 강을 건너기 위해 나무로 짓던 다리. 강의 수위가 높아지는 여름이면 쓸려 내려가 매년 가을에 다시 짓는다고.


03 가마솥 식당

백숙 전문점. 주천면에서 가장 맛있는 중국집을 하던 분들이 운영하는 덕분에 중식 메뉴도 맛볼 수 있다.



에디터

* 편집자: 이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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