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자락에서 발견한 동네의 가능성

도시공감협동조합 건축사사무소

조윤|


이준형 실장


용산고등학교 사거리 뒤편, 세월을 가득 머금은 가옥들이 줄지어 늘어선 골목 초입에 작은 건축사사무소가 있다. 도시, 건축 분야의 전문가들이 합심하여 운영하는 ‘도시공감협동조합 건축사사무소’는 후암동에서 다양한 형태의 공간을 만들고, 동네의 이야기를 기록해왔다. 이곳에서 지난 3년간 팀원들을 이끌어온 이준형 실장은 뜨는 동네가 아닌, 사람 냄새 나는 동네로서 후암동이 지닌 매력을 말한다.


도시공감협동조합 건축사사무소는 어떤 일을 하나.

마을 계획, 건축 등 도시를 구성하는 하드웨어적인 영역과 커뮤니티와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부분을 포괄하며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다. 후암동의 오래된 집들을 기록하는 아카이빙 작업인 ‘후암가록’ 프로젝트와 ‘후암주방’, ‘후암서재’ 등의 공유 공간 프로젝트가 대외적으로 잘 알려진 편이다. 그 밖에도 건축 설계, 공간 설계 프로젝트나 도시재생 관련 용역을 맡기도 한다. 현재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후암동 골목길 재생 사업’에서 실무를 맡고 있고, 한양 도성 성곽 주변 마을들을 연결하여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작업도 수행 중이다.




후암동에 자리 잡은 이유는 무엇인가.

별도의 사무실 없이 일하다가 처음으로 정착할 지역을 고를 때, 우리가 하는 일의 특성을 고려해서 지역 기반으로 활동을 전개해볼 만한 동네를 찾으려 했다. 그래서 서울의 구도심을 중심으로 적당한 곳을 수소문하던 중 우연히 후암동을 접하게 됐다. 직접 방문해보니 오래된 집이 많고 남산이 가까우며, 언덕 지형 덕분에 경관이 다양하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처음에는 이와 같은 물리적 요소가 마음에 들었는데, 나중에 동네의 역사를 살펴보니 과거 일본인들이 살았던 흔적인 문화주택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문화주택


※ 문화주택

문화주택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서양식 주택이다. 대표적인 일인(日人) 거주지였던 후암동에는 고위인사들이 살던 문화주택이 상당수 남아있다. 특히 삼광초등학교 인근에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문화주택이 모여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上: 후암서재

下: 후암주방


공유 공간인 후암주방과 후암서재를 운영 중이다. 동네에 공유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두 공간은 공유 경제의 관점이 아닌 주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기획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좋은 공간에서 자신만의 경험을 쌓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1, 2인 가구 비율이 증가하는 반면 주거비 부담은 커지고 있어 집이란 공간이 변화하는 수요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에는 집이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하니 마을 내 커뮤니티 공간이 그 기능을 대체하면 어떨까 싶었다. 하나의 마을에서 도보로 방문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색다른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을 때, 방문객 간의 네트워킹이 이뤄질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후암가록 전시 콘텐츠


세 번째로 문을 연 ‘후암가록’은 앞선 두 공간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녔다.

후암주방이나 후암서재 모두 전통적으로 집이 담당하던 기능을 분담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고, 그러한 콘셉트에 따르면 다음으로는 빨래방과 같은 공유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게 맞다. 그런데 지금까지 진행해온 아카이빙 작업의 결과물이 쌓이는 걸 보며 그것을 외부에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체적인 아카이빙 활동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계획하게 되었다. 입장료를 따로 받지 않으므로, 사실 수익을 내긴 어렵다. 따라서 창작자들이 전시 공간이나 쇼룸으로 대관할 수 있도록 대관 사업을 통해 수익을 창출할 계획이다.


※ 후암가록

후암동의 20년 이상 된 집들을 기록하는 ‘후암가록 프로젝트’의 전시 공간. 도시공감협동조합이 지금까지 기록한 집들의 외관 및 구조를 도면과 이미지로 정리해 두었으며, 추후에 후암동 관련 굿즈 판매를 병행할 예정이다. 무인으로 운영되어 누구나 들어와 차 한잔을 즐기며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주소: 서울 용산구 후암로23길 32

이용시간: 매일 10:00~21:00




후암동은 서울의 중심부에 있는데도 주변 지역보다 한적하면서도 사람 사는 동네다운 분위기를 지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후암동에는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빌라와 협소주택, 그리고 굉장히 오래된 주택이 공존한다. 주거 형태가 다양하다는 것은 주민들의 삶의 형태도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이 한적하면서도 다른 곳과는 조금 다른 후암동의 성격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도시공감협동조합의 사무실과 후암서재, 그리고 후암주방이 있는 구역은 건물을 부수고 다시 짓는 건축 행위가 금지되어 있다. 이런 동네가 개발되면 대학가 앞의 빌라촌 같은 모습이 되기 쉬운데, 건축 행위가 제한되어 있다 보니 지금과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협소주택


※ 협소주택

최근 후암동에는 작은 필지에 지어 올린 협소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이 많고, 주택 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후암동 특성상 70㎡(약 20평) 내외의 작은 집을 짓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골목골목 자리 잡은 협소주택의 감각적인 외관이 동네의 풍경에 재미를 더한다.




두텁바위로, 소월로 인근에 신축 다세대주택이 들어서는 것을 보면 새로운 주거 수요가 생겨나는 듯하다.

우선 후암동은 도심 접근성이 좋으면서도 주거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라, 혼자 사는 직장인이 많다. 그리고 인근에 초, 중, 고등학교를 모두 갖추고 있어 젊은 부부들이 자녀를 양육하기에도 괜찮은 여건이다. 학생이나 어르신, 어느 한쪽이 월등히 많은 방향으로 인구 구성이 편중되지 않아서 상권이 다양성을 지닌 채로 공존한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외국인도 꽤 많이 사는 편이다. 원래는 용산 미군 부대의 영향이 컸는데, 최근에는 해방촌이나 경리단길 인근에 살던 외국인들이 조용한 동네를 찾아 후암동으로 넘어오기도 한다.


후암동은 마을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어 있는 편인가.

후암동이 속한 용산구는 마을 공동체나 커뮤니티가 발달한 편이 아닌데, 후암동 안에서는 나름대로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어 있다. 공동 육아 커뮤니티도 있고, ‘후암골 마을 가드너’라는 이름으로 마을 화단 가꾸기 활동을 하시는 분들도 있다. 연말에 동네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모여서 마을 잔치나 운동회를 벌이기도 한다. 대규모 도시재생 사업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만, 마을에서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모임과 그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잘 형성되어 있는 편이다.


최근 후암동에 개성 있는 공간들이 생겨나면서, 일부 매체에서는 후암동을 ‘포스트 경리단길’이라 칭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앞으로 후암동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는 미지수다. 해방촌이나 연남동 등 소위 ‘핫플레이스’라 불리는 곳은 사람들이 동네 자체를 일종의 브랜드로 여기고 방문하여 소비하지만, 후암동의 경우 특정 공간을 방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또한, 연남동이나 해방촌과 비교했을 때 후암동에는 규모가 크고 튼튼한 상권이 형성되어 있지는 않다. 따라서 기존의 뜨는 동네와는 양상이 크게 다를 수 있다. 개인적으로 후암동이 많은 이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상업 지역으로 바뀌기보다는, 지금처럼 주거지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매력적인 상업 시설이 드문드문 있는 모습을 유지했으면 좋겠다.

에디터

* 편집자: 강필호

조윤

yjo@urbanpl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