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동네 아는강원 1》 미리보기 #5

양양: Boarder's Heaven

김작가|

양양은 송이의 고장이자 낙산사가 있는 땅이었다. 서브컬처와는 동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바야흐로 이곳은 한국 서핑의 새로운 메카다. 바다와 땅에서 보드에 인생을 건 사람들이 이곳을 강원도 서브컬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서퍼스 고성용 대표


서핑의 개척자: 서퍼스


지역은 예술과 문화를 통해 젊어진다. 임대료가 저렴하고 한적한 지역에 젊은 예술가들이 몰려들어 그 일대가 힙플레이스로 바뀌는 현상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멀리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 독일의 이스트 베를린이 있고, 가까이는 서울의 홍대 앞, 을지로가 있다. 도시가 아닌 자연에 반해 정착한 사람들의 동네 역시 우리는 많이 알고 있다. 이주 붐이 일었던 제주나 지리산 인근 등이 그렇다. ‘풍경이 있는 삶’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서핑의 메카가 된 양양은 그중에서도 특이한 경우다. 제주 중문과 부산 송정의 해변에서 파도를 타던 이들이 서울에서 가까워진 양양에 터를 잡았다. 처음에는 소수였지만 친구 따라 오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었다. 2010년대를 전후하여 주말마다 이곳으로 향하는 이들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기사문에서 죽도로, 그리고 인구해변을 거쳐 하조대 일대까지 파도가 이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서핑숍을 볼 수 있게 됐다. 한국의 1세대 서퍼라 할 수 있는 서퍼스(SURFERS) 고성용 대표는, 이곳에 서핑의 씨앗을 뿌린 인물 중 하나다.

제주 중문이 고향인 그는 바다에서 보디보드(bodyboard, 엎드려 타는 소형 서프보드)를 타고 놀며 지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동네 앞바다에서 서핑을 시작한 그는 국내에서 열린 각종 서핑 대회에 출전해 수십 차례 우승했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최고의 서퍼가 됐다. 2008년 제주에서 상경해 스포츠용품 브랜드 무라사키스포츠(MURASAKI SPORTS), 서프웨어 브랜드 빌라봉(BILLABONG) 등에서 일했다. 그 시기에 양양을 알게 되어 1년가량 들락거렸다.


“이곳은 생각보다 서핑 포인트가 많았다.”




결국 그는 2010년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양양으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죽도해변 인근의 기사문에 터를 잡았다. 양양에서도 가장 먼저 서핑 문화가 정착한 곳이다. 그러다 2015년 지금의 죽도로 옮겼다.


“기사문은 지리적으로 봤을 때 다소 한정적이다. 해변이 좁고 마을도 폐쇄적인 느낌이었다. 조용한 마을에 갑자기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시끌벅적대는 걸 주민들이 수용하지 못했고, 갈등이 있었다.”


죽도에서는 그럴 일이 없었다. 지역 주민이 사는 곳에서 해변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고, 기사문보다 더욱 조용했다. 최근에야 이 주변에 해안도로가 깔렸으니 당시 풍경을 짐작할 만하다.


“동해는 바다가 좁은 편이지만 그 대신 더 좋은 파도가 들어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파도가 있는 곳은 중문의 해변이다. 그러나 지속 가능성을 따지면 양양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서핑 상급자에게는 오히려 바닥에 돌이 있는 환경이 좋고, 입문자에게는 수심이 얕은 바다가 좋다. 양양은 입문자와 상급자 모두를 충족시키는 해변을 갖춘 곳이다.



서퍼스에서는 자신의 취향과 수준에 맞는 서핑용품을 고를 수 있다


그의 매장이 있는 죽도해변은 온통 서퍼를 위한 공간으로 가득하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서핑숍이고 서퍼들이 운영하는 술집, 카페, 식당도 꽤 많다. 여느 ‘올드’한 관광지의 모습이 아니다. 그리고 이 어촌을 힙플레이스로 바꾼 사람은 대부분 실제 서퍼들이다. 도시에서 생활하다 오직 서핑을 위해 이곳으로 내려온 사람들. 전직 국가대표 스노보더도 있고, 대기업에 다니다 사표를 내고 온 사람도 있다. 앞서 말했듯 ‘바다의 풍경’에 반해 내려온 게 아니라, ‘바다의 문화’에 빠져 삶 자체를 바꾼 사람들이다.


“스포츠나 문화에 빠져들면 생활이 다 바뀐다. 나이키(Nike)를 입던 사람이 서핑 브랜드의 옷을 입는다. 그만큼 서핑은 중독성이 강하다. 아예 일상 패턴이 바뀌는 사람을 많이 봤는데, 그 이유는 서핑이 원시적인 스포츠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서핑은 내가 패들링해 파도를 잡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다 보니 인공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아무리 장비가 좋아도 파도를 읽고 타는 감각을 당할 수가 없다. 그래서 파도 앞에 서면 모두가 평등해지는 것이다. 누구든 허우적댈 수 있고, 누구든 수준급 실력을 갖출 수 있다. 서핑에서는 갑을 관계가 파괴된다. 그러다 보면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바뀌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서로 좋은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호주의 서핑 브랜드 립컬(RIP CURL)을 취급하는 그의 가게에는 늘 많은 사람이 오간다. 서핑하러 온 외지인과 이 동네의 서퍼를 구분하는 방법은, 그들이 고 대표와 얼마나 친밀하게 인사를 주고받느냐 정도다. 파도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표정에 깃든 감정은 모두 똑같다. 우리는 그것을 설렘이라 부른다.




WSB 팜 서프 매거진 장래홍 편집장


한국 서핑의 새로운 흐름: WSB 팜 서프 매거진


서퍼란 자연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있는 그대로의 바람과 있는 그대로의 파도에 순응한다. 하나의 파도는 평생에 한 번뿐이라는 자세를 굳건히 지킨다. 자연농법에 충실한 농부와 같다. 하지만 기술을 활용해 더 나은 농사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농부가 있는 것처럼, 자연을 존중하되 한국 서핑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서퍼도 있다. 죽도해변과 인구해변 사이 마을에 있는 WSB 팜 서프 매거진(WSB FARM Surf Magazine)의 한동훈 대표와 장래홍 편집장이 그 주인공이다.

그들이 만든 동명의 앱을 두고 서핑 다큐멘터리 작가 김울프는 “한국 서핑의 중요한 흐름”이라 단언했다. 이 앱은 단순히 기록 영상과 기사만 있는 게 아니라 서핑에 관한 복합적 매거진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전국 스물네 곳의 서핑 스폿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전송하는 스트리밍 서비스다. 장래홍 편집장은 말한다. “다른 지역에 사는 서퍼들이 파도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현지의 서핑숍이나 지인에게 물어보는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난기가 좀 있으면 도저히 서핑을 할 만한 파도가 아닌데도 파도가 좋다고 ‘낚는’ 일이 생긴다. 눈으로 직접 파도를 볼 수 있다면 그런 해프닝은 없지 않을까.” 이런 이유를 포함해서, 이 앱은 서핑을 인터넷 쇼핑처럼 만든다. 새벽 5시에 서핑하기 위해 떠난다고 치자. 기존의 방법으로는 지극히 제한된 곳의 정보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국의 파도를 한꺼번에 볼 수 있기에 바로 계획을 바꿔 내 마음에 드는 장소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일반적인 날씨 앱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바람의 방향과 속도, 파도의 높이와 물때까지 시간대별로 제공한다. 데이터와 기술, 자연과 사람의 총합이다.




한동훈 대표는 25년 넘게 스노보더로 살았다. 스노보딩 시즌이 아닐 때는 서핑을 했다. 1년의 반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보냈다. 2013년 수도권에서 영상 일을 하던 장 편집장을 만났다. 콘텐츠를 고민하던 한 대표와 영상 작업이 가능한 장 편집장은 국내에 서핑 다큐멘터리가 없다는 현실에 공감했다. 서핑 문외한을 입문시키기 위해 참고해야 할 자료가 해외 영상밖에 없다는 점이 늘 아쉬웠다. 이는 서핑의 주요한 특성인 ‘로컬리즘’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했다. 지역마다 다른 바다가 있고 다른 물길이 있다.

그 바다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 지역에 사는 이들이다. 한국의 파도는 발리, 호주 골드코스트, 캘리포니아와 다르기에, 다른 방법으로 파도를 타야 한다. 이를 제대로 담고, 보여주고 싶었다. 2013년 그들은 양양에 사무실을 차렸다. 흰 딸기(White Straw-Berry, WSB)의 영문 앞 글자에서 이름을 따왔다. 파도가 부서질 때 일어나는 흰 거품을 파도 안에서 보고 있으면 커다란 딸기처럼 보인다는 데서 착안했다.



공간과 물건 곳곳에 적혀 있는 로고에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렇게 만난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양양을 중심으로 피어오른 서핑 붐을 타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했다. 동명의 서핑 무크지를 창간, 2016년과 2017년 여름에 발간했다. 주말이면 죽도에 내려오는 뮤지션, 아예 양양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뮤지션들과 함께 서핑을 주제로 컴필레이션 음반도 만들었다. 그들이 들인 자산에 비하면 잡지와 음반에 쏠린 주변의 관심은 매우 큰 편이었다. 두 분야 모두 초보자들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할 수 없는 양질의 결과물이었다. “서핑을 좋아하고 이 문화를 키워보고 싶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던 거죠.” 집채만 한 파도를 좇아 세계의 바다를 누비는 국내외 프로 서퍼부터 서핑 문화에 대한 동질감이 없다면 섭외조차 힘든 유명인까지, 이들의 부탁에 기꺼이 온라인・오프라인 콘텐츠의 주인공이 되어주었다. 한국 하위문화의 초창기 역사와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싶다는 취지에 고개를 저은 사람은 없었다.

WSB는 이제 다큐멘터리와 기록을 넘어 서핑 예능에 도전하고 있다. 배우 정태우가 출연하는 서핑 웹 예능 <태우로와>가 그것. 역시 서핑 마니아인, 방송국 소속의 PD와 손잡고 제작하는 프로그램이다. 최근 예능의 트렌드인 교육과 관찰 콘셉트를 빌렸다. 예능이라는 필터를 통해 많은 것을 보여주고 확산하는, 시대의 흐름을 이용하는 셈이다. “서핑 마니아들은 시간이 흐르면 어떤 틀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그 틀이 굳어지면 고인 물이 된다.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다.” 현재를 기록하고, 미래를 견인하려는 WSB의 행보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본 콘텐츠는 《아는동네 아는강원 1》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

에디터

* 편집자: 아는동네

김작가

zakka666@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