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이야기를 만나는 날

서울시 농부의 시장

송은호|

삭막한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살다 보면 계절의 흐름을 놓치기 쉽다. 그런데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에선 때로 빌딩숲 한가운데 계절이 펼쳐진다. 바로 '서울시 농부의 시장'이 열리는 날이다. 매 계절 조금씩 다르지만 격주 금요일과 토요일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농부들이 분주히 땀 흘려 모은 계절의 결실을 사람들 앞에 펼쳐 놓는다.





코로나19로 벚꽃과 푸른 녹음에서 억지로 눈을 돌려야 했던 우리처럼, 농부의 시장도 봄과 여름에는 계절을 잊은 듯 잠깐 멈춰 있었다. 그러다 이윽고 찾아온 가을과 함께 다시 열렸다. 그 소식을 듣고 에코백을 하나 챙겨 계절을 만나러 향했다. 얼굴에 닿는 선선한 아침 공기와 단풍으로 물든 가로수 사이에, 시장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코끝에 가을

11월 농부의 시장은 가을 제철 작물을 모두 모았다는 설명 그대로였다. 체온을 재고 장터에 입장하니 곧바로 달콤한 군고구마 냄새가 코에 닿는다. 허기지게 만드는 냄새를 따라 걸으니 산더미처럼 쌓인 알밤과 빨갛게 익은 사과, 커다란 단감과 홍시들이 보여 눈까지 즐거웠다. 거기에 이름과 똑 닮은 생김새의 노루궁둥이버섯, 향긋한 송이버섯과 표고버섯, 큼직한 늙은 호박과 주먹만 한 밤호박까지. 이제서야 진정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동네 마트뿐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손쉽게 장을 볼 수 있지만 이렇게 계절이 만들어낸 빛깔을 눈에 담고 계절의 향을 맡는 건 오로지 시장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알알이 윤이 흐르는 밤톨과 토실토실한 노루궁둥이버섯은 웃음이 날 만큼 귀여워 눈에도 담고, 사진으로도 남겼다.





이야기를 팝니다

가을의 빛과 향뿐 아니라 농작물에 담긴 이야기도 오래도록 붙잡았다. 장터 입구 근처에서 빈 에코백을 메고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어느새 알밤을 파는 농부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떤 밤 찾으세요?” 그러고 보니 생김새는 다 비슷한데, 종류가 제각각이다. 품종 이름 아래에는 에어프라이어용 밤, 쪄 먹는 밤처럼 알기 쉬운 말도 적혀 있었다. 껍질을 까기 어려운 군밤은 보통 구워 먹고, 단단하고 당도가 높은 밤은 생으로 먹으면 맛있다고 한다. 알밤농원에서는 밤 품종 450여 개 중 40여 종을 재배한다고. 밤의 품종만 수백 개가 된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야말로 알밤학개론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빈 가방에는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담겼다. 기와에서 자라고 소나무 잎을 닮아 ‘와송’이라는 이름을 가진 약초 이야기부터 조청이나 엿의 농도보다 진해 ‘강청’이라고 불렀다는 도라지 강청까지. 시장에 모인 농부들은 판매자라기보다 이야기꾼에 가까웠다. 조그만 밤호박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호박을 가져온 농부는 호박은 어떤 걸 골라야 맛있고, 어떻게 먹어야 맛있는지 말을 건넨다. 그러고는 아주 노랗게 잘 익었다면서 칼로 썰어서 속을 보여준다. 단호박은 잘 여문 것일수록 단단하고 일교차가 큰 고랭지에서 자랐다면 더욱 맛있다고. 호박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농작물은 큰 일교차를 견뎌내고 자라면 깊은 맛을 낸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적당히 받은 식물이 더 맛있기 때문이라고. 뭐든 온실에서 자란 것보다는 야생에서 자라난 것이 맛이 좋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스트레스 때문이라니. 가끔 나를 짓누르는 듯한 스트레스도 더 나은 결실을 이루는 데 필요한 과정인 걸까 싶었다.




함께 살아가기

비어 있던 에코백을 가득 채운 건 이야기뿐 아니라 가을의 맛도 담겼다. 장터를 중간 정도 둘러봤을 때쯤, 드디어 군고구마 냄새가 나는 곳을 발견하고 홀린듯 그 앞으로 향했다. 달콤한 냄새를 맡고 온 걸 알아차렸는지 농부는 종이봉투에 군고구마를 하나 담아주었다. “방역 때문에 여기서 드시는 건 안 되고, 가져가서 드셔 보세요. 여기서 먹어보면 무조건 사실 텐데(웃음).” 달콤한 냄새만으로도 무조건 사고 싶다고 말했더니, 방금 구운 고구마를 하나 더 넣어주었다. 따뜻한 고구마를 가방에 넣고 마음마저 훈훈해져 찬찬히 장터를 둘러보는데, 커다란 덩어리의 소금이 눈에 띄었다. 용융소금이라는 단어가 낯설어 말을 걸었다. “천일염에는 바다가 오염되어서 생긴 불순물이 있는데, 그걸 빼려고 열처리를 한 소금이에요. 소금이 녹는점에 닿으면 불순물도 빠지고 열처리 중에 생긴 발암물질도 빠져요.” 그 과정에서 나트륨은 줄어들고, 미네랄은 농축되어 금처럼 귀한 소금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곤 작은 소금 한 병을 내 가방에 쏙 집어넣는다. “가져가서 점심 먹을 때, 조금 덜어서 먹어 봐요. 이거 정말 귀한 건데 가져가는 사람은 수지맞는 거예요. 오늘 어느 정도 주려고 작정을 하고 나왔거든요(웃음)” 그리곤 소금 이야기가 담긴 책자까지 하나 건네며 말했다. “농부들이 힘써 기른 작물의 참맛을 알게 해주고, 이들이 지닌 가치를 알게 하는 게 다 같이 사는 길이잖아요. 모두가 건강해지는 길이죠.” 그저 환경을 보전하려는 농부의 작은 움직임으로만 알았는데 그의 말에는 우리 모두를 지키고자 하는 혜안이 녹아 있었다.




그날, 들고 간 빈 가방은 풍성한 계절의 맛이 담긴 작물과 이야기가 더해져 어깨가 무거울 정도로 가득 찼다. 그렇기에 농부의 시장을 방문하는 이들이라면, 빈 가방을 꼭 가져가야 한다. 예상치 않은 이야기와 풍성한 인심이 넝쿨째 굴러들어올 수 있으니 말이다. 


기획·제작 서울시 X 어반플레이

송은호 에디터 
황지현 포토그래퍼  




<서울 파머스 마켓>은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로 서울시 내에서 열리는 직거래 장터를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합니다. 가치 있는 소비를 독려함으로써 농부와 소비자 모두가 공생할 수 있는 건강한 생태계를 만들어나갑니다.

에디터

송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