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의 이야기를 잇다

돌창고프로젝트

송수아, 정다솜|

남해 삼동면 영지리. 섬이었던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두커니 선 채로 이곳을 지켜본 돌창고가 있다. 한때는 마을 사람들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보관했지만,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이곳에 젊은이 둘이 둥지를 틀었다. 문화와 예술을 통해 지역 청년들과 새로운 삶의 방법을 모색하는 돌창고프로젝트의 최승용 기획자를 만났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남해 마을의 50년 된 돌창고를 문화공간으로 만들고자 이것저것 하는 프로젝트 기획자 최승용이다.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친구가 남해에 우주선 같은 것이 있다고, 네가 아주 재미있어할 공간이 있다며 한번 보라고 하더라고요. 그것이 바로 남해의 자연석을 쌓아 올린 돌창고인데, 서울에 돌아가서도 그 돌창고가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아 다시 남해로 내려오게 됐다.


돌창고는 본래 어떤 공간인가.

마을 단위로 쌀과 비료를 보관해두던, 말 그대로 창고였다. 1970년대 남해대교가 생기기 전까지 남해는 섬이었다. 아무래도 육지보다 쌀과 비료가 굉장히 귀하다 보니 일반 창고가 영 안전하지 못했나 보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더 튼튼한 건축 재료를 찾다가 산의 자연석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석공이 산에서 돌을 깨주면 마을 사람들이 지게에 지고 날라서 지었다.




현재는 돌창고는 어떻게 이용되고 있나.

‘돌창고프로젝트’라 하여 돌창고를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크게는 전시와 매달 여는 플리마켓 ‘돌장’, 그리고 책방이 있다. 지난겨울에는 남해 식재료를 이용한 나베요리를 먹으며 일본 사람과 이야기하는 예약제 심야식당을 팝업 형태로 기획하기도 했다.


문화공간이라 하면 으레 연상되는 멋들어진 새 건물을 짓지 않고 돌창고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건축적으로 견고하기도 하고 아름답다. 무엇보다 이곳은 50년이라는 시간을 버텨오는 동안 있었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기능적이고 예술적인 데다 지역성까지 담고 있으니 문화유산으로의 가치가 충분하다. 또, 제가 역사와 문화콘텐츠를 전공했다 보니 자연스레 전통 문화 유산을 활용한 문화콘텐츠 기획을 시도한 것 같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 모습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나아가 미래까지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지 않나. 그러니 오래된 이야기를 잊지 않고 이곳에서 이어가자는 의도도 있었고, 옛 남해 사람들이 보물과도 같은 쌀을 보관했듯 우리의 보물인 예술과 문화를 채워 창고의 기능을 이어가자는 마음도 있었다.

처음 돌창고에 내려온 후 일 년 동안은 별도의 리모델링 없이 이 공간을 사용했다. 일 년 동안은 그저 관찰하고 싶었다. 하루 동안의 시간별로 혹은 계절별로 빛은 어디서 어떻게 들어오는지, 바람은 어느 정도 부는지, 이곳에는 어떤 각양각색의 삶들이 얽혀 있었는지 관찰하고, 그다음에 모아온 이야기를 가지고 리모델링을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픈 때 진행했던 <정지비행> 기획 전시가 인상적이었다.

오픈 기획 전시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낡은 모습 그대로를 지닌 돌창고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림을 전시하고 싶었다. 화이트큐브(깨끗한 흰색 벽의 전시관)와는 다른, 마치 고대벽화처럼 보이는 작품을 원했다. 그러면서 김정수 작가를 만나게 됐다. 작가님께 서울에서 그림을 작업하는 것보다 남해에 직접 내려와 돌창고안에서, 돌창고가 주는 영감과 자극으로 작업했으면 좋겠다고 청했고, 작가님이 이곳에서 두 달 동안 머무르면서 완성하신 그림이 '정지비행'이다.

정지비행은 “공중의 한 지점에 멈추어 자세히 보는 것, 오래 보는 것, 깊이 보는 것은 나의 날갯짓이 만든 바람을 타는 일이며, 누군가에게는 정지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는 온전한 나의 비행을 하는 것이다.” 라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다. 당시의 돌창고 프로젝트와도 결을 같이 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정지비행을 전시 타이틀로 정했다.


프리마켓 돌장이 활발하게 진행된다고 들었다.

시골에서 문화와 예술로 경제활동을 하며 살아가자는 의미에서 돌장을 시작했다. 남해에도 수공예품이라든지 다양한 문화상품을 소규모로 생산하는 작업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농수산물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상품을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는 장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그래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면대면으로 만날 수 있도록 플리 마켓 ‘돌장’을 기획했다.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 돌장이 열리는데 인근 지역인 진주, 삼천포, 구례, 부산에서까지 사람들이 찾아온다.





처음 돌장을 열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독일 마을 맥주 축제 기간에 맞춰 인문학 살롱, 음악공연, 독립영화 상영 및 감독과의 대화, 진행 중인 전시와 연계한 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덧붙인 작은 축제를 만들었다.

그렇게 돌장을 운영하다 보니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남해 사람들이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기획과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렇게 모인 뜻 있는 남해의 젊은이 3명이 돌잔치 프로젝트를 공동기획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플리마켓 문턱도 계속해서 낮춰가고 있다.


'남해 비밀기지'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하다.

청년들이 무엇을 시작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가 ‘공간’이다. 그런데 도시에서 시골로 이주해올 때도 마찬가지다. 시골로 내려와 집과 가게를 알아보는데 1년 이상 걸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게다가 타격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사회 시스템이 부재하기 때문에 청년들이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걸 섣불리 시도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뭐든 시도하기 쉬운 최소한의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남해로 이주해 무엇인가를 시도하고자 하는 청년들이 이 비밀기지에서 작업하고, 이익을 창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매일 보는 익숙한 바닷가, 논밭, 공터에 흰색 큐브형 비밀기지가 들어서고 사람들이 온다면 그곳에서 바라본 세상은 또 다를지 않을까. 익숙한 환경을 재구축해 그곳에서 다시 일상을 낯설게 보는 것이 청년들이 할 수 있는 ‘공간투쟁’의 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이 비밀기지가 세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새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비밀 기지적 상상력이 펼쳐지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




여태 말씀하신 것들과 현재 하고 계신 일들을 되짚어보면, 돌창고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그 활동들에서 남해라는 지역의 ‘사람들’과 ‘잇기“라는 키워드가 공통으로 계속 발견되는 것 같다. 돌창고 공간 자체도 아카이브로서 의미가 있는데 이를 보존하고 활용하면서 남해 지역의 이야기를 새로 만든다는 느낌이다.

사람들의 기억과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들이다. 그 무형의 것들은 언제든지 왜곡되거나 잊히고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돌창고라는 ‘눈에 보이는’ 유형의 하드웨어가 남아 있다면 이야기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일을 막을 수 있다. 그 존재만으로 지난 이야기들의 물적 증거가 되니까. 여기까지가 원형의 보존 차원이라면, 우리는 이 차원을 넘어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돌창고가 ‘지금 남해에 필요한’ 기능을 새로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그것이 바로 문화 인프라, 문화 공간이라고 봤다. 현대미술 전시, 인디 음악공연, 플리 마켓 모두 그 맥락에서 시작한 것이다. 기능은 달라졌어도 사람들은 원래 이곳이 어떤 공간이었는지, 어떤 이야기로 있었는지 궁금해 한다. 그렇게 옛이야기들을 자연스레 흡수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새로운 이야기를 재생산한다. 옛 남해의 기억 아카이브인 돌창고를 보존하고 그를 활용한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어가는 일, 그것이 돌창고프로젝트가 남해의 이야기를 잇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저에게 남해는 살아내야 하는 장소입니다.”


마지막으로, 본인에게 남해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나에게 남해는 살아내야 하는 장소다. 사실 내 고향은 옆 동네 하동이다. 아직은 ‘남해는 이런 지역성을 가지고 있다.’ 라고 감히 얘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남해는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을 낀 시골에서 나고 자란 한 젊은이가 서울이란 대도시를 경험하고 다시 돌아와 자립으로 살아내고자 하는 지역이다. 어떻게 해서든 제 삶을 풍요롭게 하며 살아내야 하는 곳이고. 돌창고도 그렇다. 오랫동안 그 기능을 상실하고 버려져 있다가 나와 만나면서 새로운 역할을 하는 이 돌창고도, 다시 살아나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매일 아침 돌창고를 보며 ‘너도 살고, 나도 살자.’라며 되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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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 편집자: 박혜주

송수아

suasong0307@gmail.com

정다솜

피터팬 콤플렉스를 한 꼬집 정도 가진, 방랑벽이 있는 용의주도한 와식생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