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핏하면 차에 불 지르는 일이 발생하기로 악명 높은 빈민촌을 도시재생 사업으로 시민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이 고개를 젓겠지만, 감히 그렇다고 답하는 프로젝트가 있다. 코펜하겐의 치부였던 빈민촌을 코펜하겐에서 가장 힙한 동네로 거듭나게 한 수페르킬렌(Superkilen)이다.
슈페르킬렌 개장식
ⓒ Archinet
뇌레브로, 이민자의 터전 혹은 코펜하겐의 화약고
수페르킬렌 프로젝트를 설명하려면 먼저 뇌레브로(Nørrebro)가 어떤 동네인지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코펜하겐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고작 4㎞ 떨어진 뇌레브로 지역은 빈민가로 악명 높았다. 주거지가 형성된 이래로 2세기 동안, 각종 시위와 무력 충돌이 이곳에서 촉발됐다.
그중에서 뇌레브로라는 지명에 주홍글씨를 덧입힌 사건은 1993년 발생한 ‘뇌레브로 폭동’이다. 덴마크 정부가 유럽연합(EU)에 가입하기로 하자 뇌레브로에서 세계화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들고일어났다. 5월 18일 불붙은 시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번졌다. 코펜하겐 경찰은 성난 시위대의 돌팔매질로 다친 동료를 구하려 실탄까지 쏴야 했다. 시위대 13명과 경찰관 93명이 다쳤다.
유독 무력 충돌이 잦은 이유는 이 지역이 코펜하겐에서 유독 경제적으로 낙후된 동네이기 때문이다. 1852년 코펜하겐을 둘러싼 성벽을 철거하며 도시에서 일하는 노동 계층 수천 명이 시골이었던 뇌레브로로 이주했고, 이에 맞춰 5~6층짜리 집단주거지가 우후죽순 들어섰다. 산업화 시기에는 조선소와 콘크리트 공장 등에서 일하는 산업 역군으로 가득 차 번화하기도 했으나, 인건비가 올라 제조업이 쇠퇴하자 인구가 급감했다.
노동자가 떠난 자리는 가난한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학생이 차지했다. 1880년 인구조사부터 이미 세계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들어와 그 출신을 조사해보니 15개국이 넘었다. 1960년대에는 파키스탄과 모로코 등에서 이주노동자가 유입됐고, 1980년대부터는 이라크와 이란, 레바논 등에서 난민이 들어왔다.
이런 역사 때문에 지금도 이곳에는 이민자와 학생같이 가난한 계층이 주로 산다. 주민 7만 명의 평균 연령은 33세로, 주민 28%가 이민자 혹은 이민 2세대다. 무슬림 국가 출신 덴마크 이민자 가족 절반 이상이 뇌레브로에 둥지를 틀었다.
쐐기, 무너진 공동체를 재건하라
시위뿐 아니라 폭력 단체 활동, 사회적 결속력 결여, 만연한 범죄가 뇌레브로에 빈민촌이라는 인식을 덧입히고 있었다. 코펜하겐시 자체적으로 해결책이 필요했고, 분열된 이민자 밀집 지역 뇌레브로를 덴마크 사회로 포섭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코펜하겐시는 이 지역이 빈민굴로 전락하는 이유를 다른 도시에서 동떨어진 탓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뇌레브로 지역에 방치된 공공부지를 공원으로 정비해 폭력과 범죄로 물든 지역색을 개선하는 도시 재생 사업을 발족했다. 공공 건축 사업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덴마크 도시 개발 지원단체 ‘레알다니아(Realdania)’가 코펜하겐시의 뜻에 힘을 보탰다.
뇌레브로 지역재생 공모전 대상지
ⓒ Archinet
두 단체는 2007년 공모전을 열었다. 뇌레브로 지역을 도심과 연결하는 중요한 두 도로 ‘뇌레브로 대로(Nørrebrodage)’와 ‘타겐스베이’(Tagensvej) 사이의 부지를 정비하는 공모전은 땅 모양을 본따 수페르킬렌(Superkilen)라고 이름 붙였다. 수페르(super)는 대단한 혹은 특별한, 킬렌(kilen)은 쐐기라는 뜻으로, 한마디로 ‘거대한 쐐기’란 이름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이 부지의 길이는 750m, 면적은 33000㎡에 달한다.
공모전은 지역 환경을 개선해 뇌레브로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건축 디자인의 힘으로 공공시설을 새롭게 경험하게 하며, 안전한 곳이라는 인식을 높여 동네의 사회 문화적 결속을 증진하는 것이 궁극적인 지향점이었다. 코펜하겐시와 레알다니아는 이 목표를 실현해 줄 건축회사, 조경회사, 도시 사회학자, 인종학자, 문화 지정학 예술 단체, IT 등 분야에서 최대 5개 팀을 선발하기로 했다. 2008년 6월 발표된 최종 합격 팀은 모험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한 덴마크 건축회사 ‘비야케잉겔스그룹(BIG)’, 지역 맥락을 녹여낸 작업으로 유명한 독일 조경업체 ‘토포텍원(TOPOTEK1)’, 덴마크 예술가 그룹 ‘수페르플렉스(SUPERFLEX)’였다.
코펜하겐시는 2008년 8월부터 2009년에 걸쳐 새로 조성할 공원 인근에 사는 주민과 수차례 회의를 열었다. 최대한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고자 코펜하겐시는 회의 참가자를 전방위로 모집했다. 직접 전화를 걸거나 온라인으로 연락하고, 신문 광고를 내고, 전단을 돌리고, 도서관에 포스터도 내걸었다. 사업을 맡은 세 단체(설계 팀)도 주민 회의에 참석해 의견을 들었다. 이처럼 많은 이의 노력이 담긴 수페르킬렌 프로젝트는 2010년 착공했다.
공원, 다양성의 미학을 체득하는 공간
주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한 건축 팀은 인종 다양성을 공간에 고스란히 반영하는 설계안을 내놓았다. 남북으로 긴 부지를 둘러싸고 조성돼 있던 본래 자전거 도로는 최대한 보존하고 포장재도 크게 손대지 않는 선에서 재건했다. 주변 시설을 반영해 세 구획으로 나눴다. 각 구역은 한 눈에 들어오게 빨간색, 검은색, 녹색 세 가지 색으로 구분하고,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도록 설계했다. 그러면서 건물은 일절 짓지 않았다. 실내 공간은 필연적으로 설계자가 기능을 부여해야 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설계 팀은 주민이 직접 공간의 용도를 결정하도록 부지를 야외 공간으로 남겨뒀다.
수페르킬렌 붉은 광장
뇌레브로 대로에서 수페르킬렌을 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은 붉은 광장(Den røde plads)이다. 이름 그대로 바닥을 온통 붉은색 마감재로 두텁게 칠한 곳이다. 붉은 광장 초입에는 지역 스포츠 센터이자 커뮤니티 공간인 뇌레브로홀(Nørrebrohallen)이 있다. 이런 맥락을 살려 붉은 광장은 문화 활동과 운동을 즐기도록 조성했다. 이를 위해 놀이터나 공항 같은 시설 바닥에 사용하는 충격 흡수용 마감재를 바닥재로 깔았다. 검은 고무 합성수지를 9cm 깔고 그 위에 빨간색으로 염색한 바닥재를 1cm 두께 얹었다. 그 위에는 태국에서 온 야외 무에타이 링, 놀이터 등 시설을 갖췄다.
수페르킬렌 검은 시장
좀 더 들어가면 공원이라고 부르기엔 낯선 공간이 나타난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하얀 도로 페인트로 세로 등고선이 그려진 검은 시장(Den sorte plads)이다. 등고선은 덴마크 감독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가 연출한 영화 <도그빌>에서 영감을 얻은 요소다. 건축가는 검은 시장에서 주민이 더 활발히 활동하고 교류하도록 등고선을 그렸다. 검은 시장 한 가운데 인공 언덕에서 자전거를 탄 채 내달리는 청소년을 보면 건축가의 의도가 실현되고 있음이 느껴진다.
검은 시장은 도시의 거실 역할을 하도록 설계됐으며, 주로 이슬람 문화권을 보여주는 소품으로 꾸몄다. 도하에 한 치과가 내건 네온사인과 야자수 나무가 이국적인 풍경을 만든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바비큐 틀, 모로코에서 온 별 모양 분수, 소피아에서 온 체스 테이블 등은 방문객이 이곳에 잠시 머물도록 유도한다. 특히 인기 있는 소품은 일본에서 본 따 온 문어 미끄럼틀이다. 이곳을 지나다 보면 어린아이를 둔 젊은 부모가 문어 미끄럼틀 주변 분수에 앉아 담소 나누는 모습이 흔히 보인다. 미끄럼틀을 가운데 두고 별 모양 분수를 만들어, 그곳에 부모들이 걸터앉아 아이가 미끄럼틀에서 노는 동안 자연스레 교류하도록 건축가가 의도했기 때문이다.
수페르킬렌 녹색 공원
수페르킬렌에서 가장 넓은 구역은 녹색 공원(Et grønt område)이다. 이름 그대로 넓은 녹지를 조성한 가장 전형적인 공원으로 소풍 가거나 산책하기 좋도록 조성했다. 아르마니아 피크닉 테이블, 아프리카 바비큐 틀, 카불에서 가져온 그네, 스페인 탁구대를 비치했다.
녹색 공원이 가장 커진 이유는 수페르킬렌 프로젝트 설계안을 처음 발표할 당시 인근 주민의 반발 때문이다. 주민 일부는 공원 바닥을 빨갛고 검게 칠하지 말고, 평범하게 녹지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건축 팀은 이 요구에 맞춰 녹지를 더 넓게 확보했다. 붉은 공원 바닥 마감재 유지보수 문제가 불거지자 다시 붉은색을 평범하게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제기됐지만, 수페르킬렌을 운영하는 코펜하겐시는 이를 외면했다. 공원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색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코펜하겐시의 결단은 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평범한 녹색 광장보다 붉은 광장과 검은 시장을 이용하는 주민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주민 참여가 아닌 ‘극단적 참여’
단순히 도심에 흥미로운 공간을 조성한다고 주민이 그곳에 애착을 갖고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뇌레브로 같은 빈민가라면, 정부 주도 도시 재생 사업에 반발이 한층 클 테다. 주민이 원치 않는다면, 예쁘장한 공원을 만들어도 금방 훼손되기 십상이다. 설계 팀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획 단계부터 수페르킬렌 프로젝트를 철저한 주민 참여 사업으로 준비했다. 그 방법 중 하나로, 인근 주민에게 질문을 던졌다.
“고향에서 이 공원에 설치할 소품을 가져온다면 무엇을 갖고 오고 싶은가요?”
수많은 의견이 쏟아졌다. 설계 팀은 전체 맥락에 맞는 소품을 걸러내 지역 주민 출신 국가 62개국에서 108개 소품을 가져왔다. 덴마크 안전기준에 맞지 않아 수입이 어려운 소품은 현장 사진을 토대로 직접 만들었다. 인기 높은 문어 미끄럼틀도 일본 기술자가 1개월 동안 코펜하겐에 머물며 제작했다. 공원을 찾은 이는 수페르킬렌 앱이나 웹사이트에서 108개 소품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수페르플렉스 ‘극단적 참여’ 캠페인
설계 팀 중 덴마크 예술가 집단 수페르플렉스는 주민 참여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이들은 극단적 참여(Participation Extreme)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5개국 출신 주민과 함께 그들의 고국에 직접 찾아가 공원에 가져오고 싶은 소품을 고르도록 했다.
팔레스타인 이민 2세대 10대 소녀 히바(Hiba)와 알로(Alaa)는 수페르플렉스 팀과 난생처음 중동 땅을 밟았다. 두 소녀는 동부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서안, 시리아 국경 인근에서 흙을 가져와 검은 시장 안 작은 언덕 위에 뿌렸다. 팔레스타인에서 실려 온 붉은 흙은 시간이 지나며 원래 토양과 뒤섞였다. 이민자를 덴마크 사회의 이웃으로 동화하는 수페르킬렌 프로젝트의 지향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 밖에도 태국에서 무에타이 링, 미국에서 댄스 파빌리온, 자메이카에서 대형 스피커, 스페인에서 거대 황소상을 가져왔다.
박람회장 같은 동네 공원
62개국에서 가져온 108개 소품이 어우러진 수페르킬렌은 정원과 놀이공원이 뒤섞인 듯한 현대적 모습으로 태어났다. 2012년 6월22일 공식 개관식을 열었으나 주민들은 이미 그해 봄부터 공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이 프로젝트 발아 단계부터 깊숙이 개입한 덕분에 주민은 수페르킬렌을 시 정부가 박아 넣은 눈엣가시가 아니라 이웃과 함께 만든 공간으로 여기게 됐다. 주민이 공원에 주인 의식을 갖게 한 덕분에 수페르킬렌은 6년 새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뇌레브로의 악명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수페르킬렌 도시재생 프로젝트
수페르킬렌이 조성된 덕분에 동서로 분리됐던 이웃이 최단 거리로 교류할 수 있게 됐다. 원래 자전거 도로로만 이용됐던 공터는 코펜하겐 시민이 일부러 찾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이국적인 풍광 덕분에 광고 촬영지로도 주목 받는다. 이제 뇌레브로에서 웬만한 행사는 수페르킬렌에서 열린다. 공원은 범죄도 퇴치했다. 밝은 조명을 설치하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공원을 자주 찾는 덕분에 밤에도 걱정 없이 왕래할 수 있는 곳이 됐다. 모든 공간이 야외 시설이라 바로 눈에 띄는 점도 범죄를 줄이는 데 이바지했다.
여기에 쓴 예산은 1m^2당 30만 원(1773크로네), 전체 100억 원(5850만 크로네)뿐이었다. 다양성을 근본적으로 포용한 덕분에 코펜하겐시는 크지 않은 예산만으로 파편화된 빈민가 뇌레브로를 도시에서 가장 ‘힙’한 동네로 일궈냈다. 짐짓 화려해 보이는 도시 재생 사례가 꼭 거창한 사업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수페르킬렌 프로젝트는 보여준다.
제작: 네이키드 덴마크
후원: 어반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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