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여행지는 다른 누군가가 일상을 가꾸는 터전이기도 하다. 관광객 혹은 주민. 자신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느냐에 따라 같은 지역에 발을 딛고 있어도 다른 모습을 보기 마련이다. 파란 바다, 푸르른 숲 그리고 예쁜 카페와 맛집 등 모두가 관광지로서의 제주도를 조명하던 2014년, 콘텐츠 그룹 재주상회의 고선영 대표는 <리얼제주 매거진 iiin>을 통해 이 지역의 삶을 담기 시작했다. “아무도 하지 않아 자신이 만들 수밖에 없었다”던 잡지 속에 담긴 섬의 일상은 이제 지면을 넘어 상품과 공간으로 구현되고 있다.
2010년 제주도에 내려가, 2014년 봄에 첫 호를 발행했다. 모두가 종이 매체의 종말을 이야기하며 말렸고 본인 또한 제작 이전까지 고민했다고. 그런데도 첫 호는 성공했다.
제주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오랜 기간 여행 기자로 일한 경험 덕분에 이곳에 콘텐츠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매체가 폐간되는 것을 봤기에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다. 이 지역의 콘텐츠를 누군가 알리면 좋을 것 같은데, 아무도 하지 않아 오랜 고민 끝에 시작했다. 당시 1만 부를 인쇄해 5,000부는 전국 배포 잡지 유통사에 맡기고 5,000부는 도내에서 소비하고자 했다. 그때는 지방 서점이 별로 없던 시기였는데, 2013년 통계를 보면 제주도에 서점은 26곳뿐이었다. 이 중에서도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근처에서 학습지를 주로 팔았다. 그런 상황에서 서점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책을 판매할 수 있는 새로운 유통 방식을 고민했고,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를 생각해냈다. 지금은 카페에서 굿즈나 서적 등을 판매하는 것이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경우가 없었다. 결국 아는 친구의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를 포함해 총 여섯 곳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조천에 있는 작은 게스트하우스에 스무 권을 두고 제주시에 있는 카페에 책을 가져다주러 가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그 짧은 시간에 스무 권이 다 팔렸다고. SNS에 제주를 소재로 한 잡지가 생겼다고 알렸더니 사람들이 달려와서 샀다고 하더라.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들 이런 잡지가 나오길 기다렸던 것 같다. 시기가 좋았다.
당시는 제주도가 관광지로 엄청난 주목을 받던 시기라, 수많은 미디어에서 관련 콘텐츠를 쏟아내지 않았나.
대부분의 매체가 카페, 맛집, 명소 등 트렌드에 집중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보는 여행’이란 콘셉트로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일부러 다른 미디어와 차별화되고자 노력했다기보다 직접 살다 보니 이곳만의 독특한 일상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2010년 처음 자리 잡은 대평리라는 마을에는 당시 편의점 하나 없었는데, 모든 마을 소식이 삼거리슈퍼란 곳에 모였다. 마을 주민들은 물건을 사러 가기보다는 동네 소식을 들으러 이곳에 들렀다. 심지어 어디에 집이 나오고 팔렸는지 이곳에 와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창간호 주제였던 고사리 특집 또한 여기서 정보를 얻었다. 봄이 되면 마을에서 사람을 보기 힘든 이유가 모두 고사리를 따러 가기 때문이라고 슈퍼 주인이 알려주더라. 이와 같이 제주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와 이야기를 잡지에 담고자 했다. 하루 이틀 머물고 갈 여행자의 시선이 아닌 거주민으로서 우리가 알게 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흥미롭게 전달한다.
지역의 일상을 지면에 모으자 하나의 작품이 됐다
마침 창간 당시에는 한 달 살기 여행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잡지가 추구하는 방향과 여행 트렌드가 잘 맞았다. 우리는 단순히 관광지를 여행하러 온 사람보다 제주에 살고 싶거나 이곳의 삶에 관심 있는 사람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한 달 살기 또한 흘러가는 트렌드일 뿐이다. 그 여파로 생긴 게스트하우스나 카페 등이 요즘 어려운 이유다. 유행은 지나가기 마련이고, 한 번에 생긴 것은 한 번에 사라지기 쉽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지역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제주의 이야기를 취재하고 알리며 지역에 일조한 부분도 있을 것 같다.
지역 잡지는 아카이빙 자체로 의미가 있다. 특히 우리가 매체를 통해 전하는 내용은 대부분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다. 이와 관련된 연구 자료, 서적, 녹음 자료 등이 있긴 하지만, 재미가 없으니 대중은 보지 않는다. 이를 재가공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이번 가을호 주제는 ‘사라지는 제주어’였다. 제주어는 구전으로만 남아 있는 고어에 가까운 언어다. 우리는 단순하게 ‘소멸 위기의 언어를 지킵시다’라는 문장을 쓰는 대신 사람들이 직접 제주어를 만나고 이미지로 기억할 수 있도록 콘텐츠를 제작했다. 실제로 독자들이 제주어가 얼마나 예쁘고 재미있는지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는 로컬 콘텐츠가 만드는 사람, 소비하는 사람, 기반 지역 모두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끼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크리에이터가 공공성과 수익성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로컬 콘텐츠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당장은 눈앞의 수익이 다르니 그렇게 보일 수 도 있으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공공의 가치를 위하는 일이야말로 수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로컬에 좋은 영향을 줘야 결과적으로 그곳에 사는 우리에게로 영향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2018년 가을호 표지는 화제의 중심이었던 비자림로 사진을 실었다. 지역사회의 공공 가치를 위해 행한 일이었나.
그동안 우리 잡지는 제주도에서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르는 문제를 다룬 적이 없었다. 우리가 다루지 않더라도 많은 매체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비자림로는 한때 이슈가 됐으나,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어느 지역이든 개발과 보존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비자림로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아름다운 자연으로 바라보면 지켜야 할 존재이고, 일상생활 속 출퇴근길로 바라보면 종종 렌터카로 꽉 막히는 좁은 길이 된다. 천혜의 자연은 보전해야 하지만, 일상 속에서 불편함을 겪는 이들의 고충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 이상 그 마음을 모르기에 함부로 어떤 가치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결국 입장의 차이라, 한 입장만을 맹렬히 비판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쪽에 서지 않는다. 그저 지역의 상황을 보여줄 뿐이다.
대표적인 지역 잡지로서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고, 부담감이 따르기도 할 것 같다.
부담도 크고 책임감도 크다. 최근에는 우리가 잘해야 다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유료로 전국 유통되는 지역 잡지는 <리얼제주 매거진 iiin>이 유일하다고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망하면 ‘지역 잡지는 안 된다’라는 인식이 생기지 않겠나. 우리가 잘해야 또 다른 지역에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또한 모든 지역에 지역 잡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지역성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콘텐츠가 없는 지역은 소멸하게 돼있다. 얼마나 매력적인 콘텐츠로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가가 곧 로컬의 경쟁력이다. 예전에는 제주 외에 부산 정도만 잡지를 지속해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강릉, 양양, 목포 등 다양한 지역이 주목받고 있다. 잡지가 이런 추세를 이어가는 구심점이 돼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독립 출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 잡지가 제작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나.
사실 다양하게 제작되고 있는 현상보다 제작자의 마음가짐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제작자가 자신이 만든 미디어의 목적과 방향이 무엇인지 확고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현재 지역 잡지 제작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임하는지 모르기에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잡지 제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당장 앞에 있는 수익보다 자신이 제작하는 콘텐츠의 방향과 가치를 믿고, 이를 통해 수익성이 높은 콘텐츠를 만들어 잡지 자체만으로 자립해야 한다.
재주상회는 잡지를 통해 자립해 편집숍 인스토어, 디자인 브랜드 수윔제주 등 공간, 굿즈 영역까지 사업 확장을 이뤘다.
잡지를 통해 모은 콘텐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육지와 다른 이곳만의 식문화를 취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로컬 메뉴를 개발하고, 계절마다 제주의 모습을 담다 보니, 각 계절의 색을 반영한 크레용 등을 굿즈로 제작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잡지는 우리 사업의 기본이며 시작이다. 결국 공간, 상품, 잡지 등 우리가 콘텐츠를 만드는 목적은 더 많은 사람이 진짜 제주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유명한 카페, 맛있는 음식점도 좋지만 그 속에 이 지역이 담겨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지역의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은 공간의 콘텐츠를 제주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 또한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진행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좋은 로컬 콘텐츠를 발견하고 예쁘게 재가공해 전달하는 데 힘쓸 예정이다. 그 자체가 로컬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위: 블록 모양 크레용에 담은 제주의 사계
아래: 지난 가을, 재주상회는 어반플레이와 함께 사계리에 로컬 여행자를 위한 콘텐츠 저장소 사계생활을 오픈하며 또 다른 시작을 알렸다
※ 본 콘텐츠는 《아는도시 01: 로컬전성시대》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