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자그마치’가 있었다. 적막했던 준공업지역의 한 인쇄공장을 개조해 문을 연 카페는 다소간의 의구심 어린 시선을 받았지만, 완성도 높은 인테리어와 큐레이션 콘텐츠를 통해 세간의 의문 부호를 느낌표로 바꿔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수동은 기계음과 텁텁한 냄새가 가득한 동네에서 웃음소리와 커피 향이 가득한 동네로 변모했다. 이후에도 ‘오르에르’와 ‘W×D×H’ 등 감각적인 공간을 연이어 선보인 스튜디오 ZgMc의 행보는 그 자체로 ‘성수동의 개척자’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성수동에서 다양한 공간을 선보이며 활동해왔다. 처음 이 지역을 주목할 당시 동네는 어떤 모습이었나.
디자이너들이 재료를 구매하거나 공장을 방문하기 위해 성수동을 종종 찾는다는 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근처에 잠시 머무를 만한 공간이 없어 그들은 용무만 보고 동네를 빠져나가곤 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나름의 가능성을 엿봤다. 문화공간의 잠재적 수요층인 디자이너들이 성수동을 빈번하게 드나든다는 사실, 그리고 동선 주변에 매력적인 공간이 있다면 기꺼이 그곳을 방문할 용의가 있다는 점이 모두 고무적이었다.
건축적 특색 역시 매력적이었다. 당시 성수동에는 ‘지식산업센터’와 같은 고층 빌딩이 드물었다. 낮은 건물들이 넓은 구역에 걸쳐 퍼져 있는 동네였고, 그중 공장 건물을 구성하는 붉은벽돌이나 큰 철문 특유의 질감과 느낌이 좋았다. 그런 지역색을 유지하면서 좋은 공간을 만들어낸다면 이 동네를 더욱더 매력적인 방향으로 가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옛 인쇄공장 건물을 재생한 자그마치
그 무렵 성수동에서 자그마치는 디자인, 콘텐츠적으로 유일무이한 공간이었다. 기획과 공간 구성에서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대외적으로는 카페로 알려졌지만, 나와 동료들은 문화와 디자인을 선보이는 공간으로 자그마치를 기획했다. 그때는 사업 경험이 전무해서 수익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저 디자이너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가끔 강연 등의 이벤트를 진행하는 공간이면 족하다는 생각이었다. 자그마치가 위치한 건물에는 원래 인쇄소가 있었다. 예전에는 1층과 2층 모두 인쇄 설비를 갖춘 공장이었다는데, 그래서인지 천장을 보면 하중을 견디기 위한 ‘H빔’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 모습 역시 신축 건물이나 여느 유명 카페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요소이므로, 인테리어 과정에서 그대로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 외에도 인쇄공장이 버리고 간 도면함을 소품으로 활용하는 등 지역과 건축물의 특성을 고려해 기획하고 운영해왔다.
플리마켓이나 강연 등의 팝업 이벤트를 꾸준히 개최해왔다. 이벤트는 공간 운영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나.
예전에는 놀러 가고 싶은 동네 후보군이 홍대, 이태원, 강남 정도에 그쳤다. 지금은 망원동, 을지로 등 지역 콘텐츠를 발판 삼아 새롭게 주목받는 동네가 많아졌다. 그리고 그런 동네를 중심으로 흥미로운 공간이 쏟아지고 있다. 이와 같은 추세에 더해 SNS에서 이미지를 통해 공간을 소비하는 경향이 확대되면서 공간의 수명이 예전보다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심지어 요즘은 SNS에서 수많은 공간 관련 정보를 접하다 보니 실제 방문한 적도 없는 곳을 가봤다고 착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SNS가 오프라인상의 활동을 강하게 좌우하는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특정 장소를 한 번 방문한 이후 재방문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강연이나 팝업 이벤트 등 사람들을 움직일 만한 콘텐츠가 없다면 공간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상가건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오르에르 전면부
가정집의 형태를 보이는 오르에르 후면부
뒤이어 오르에르를 선보였다. 새로운 공간을 준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사실 자그마치를 운영하면서 조금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공장 사장님들과 친하게 지낸다고 할지라도 인사를 주고받는 정도였지 활발히 교류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위 ‘뜨는 동네’에서 장사하던 지인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성수동으로 오라는 이야기를 건네곤 했다. 뜬금없는 얘기는 아니었던 게 당시 성수동의 평균 임대료는 핫플레이스가 밀집한 다른 동네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런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요소가 있었다. 바로 공간의 기본 임대 면적 단위였다. 자그마치가 있는 성수이로 주변 대다수 건물의 임대 단위는 100평 이상이다. 공장이 많기 때문에 필지 구획 규모가 다른 동네에 비해 크다. 따라서 성수동에 흥미가 있더라도 큰 규모의 공간을 임대해야만 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변에 다양한 콘텐츠 공간이 생겨나기 어려웠고, 그렇다면 이 지역에서는 자영업자들이 모여 재밌는 콘텐츠를 만들 수 없는 것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바로 그때 눈에 들어온 곳이 연무장길이었는데, 10평 단위로 부동산 매매가 이뤄진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한편 자그마치를 운영하며 느낀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단일 공간으로 구성된 자그마치에서 강연이나 이벤트를 진행할 때면 카페 영업을 쉬어야만 했고, 카페 방문을 염두에 두고 공간을 찾은 손님이 헛걸음하는 경우가 생겼다. 만약 주변에 대안이 될 만한 공간이 많았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보니 평가가 좋지 않았다. 이런 한계를 절감할 때마다 이후에는 세부적으로 분할된 공간을 구해서 개별 공간이 서로 다른 시간과 방식으로 운영되어도 문제가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르에르가 위치한 건물은 전면과 후면, 층별 구조가 모두 다르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어떤 매체에서는 “가정집을 개조했다”고 이야기하던데, 결론부터 얘기하면 잘못된 표현이다. 전면부의 상가건물과 후면부에 있는 가정집을 터서 하나의 공간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 덕분에 앞모습과 뒷모습이 다른 독특한 형태가 완성되었다. 원래 이 건물에는 총 아홉 세대가 입주해 있었다. 1층 전면부에는 가죽을 취급하는 세 가게가 입주해 있었고, 후면부에는 원룸 두 개가 있었다. 2층 전면부에는 구두공장 두 곳, 지하에는 부품 깎는 정밀공장이 있었다. 3층은 건물주가 거주하던 가정집이었다. 그랬던 건물을 하나로 아울러 새로운 공간으로 기획하면서 기존의 특성은 살리고 각각의 구역에 다양한 콘셉트와 콘텐츠를 입혔다. 이와 같은 복합적인 콘셉트와 구조는 상호에도 반영되어 있다. 오르에르란 명칭은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란 뜻을 지닌 영어 접미사 ‘-or’과 ‘-er’를 합쳐서 만든 것으로, 서로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두루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되겠다는 포부를 담았다. 다시 말해 오르에르의 복합적인 공간 구성은 그 자체로 형태와 디자인의 다양성을 상징한다.
공간 특성상 오르에르의 인테리어 방식은 자그마치와 달랐을 것 같다.
건물 전면부와 후면부의 상반되는 구조와 느낌에 주목해 서로 다른 인테리어 요소를 적용했다. 예를 들어, 건물 전면부 창에는 철제 창틀을 사용했지만, 후면부에는 목제 창틀을 설치했다. 의도적으로 상반되는 자재를 활용해 서로 다른 전•후면의 디테일을 살렸다. 이런 콘셉트의 연장선에서 1층의 전면부는 무난하고 덤덤한 스타일인 반면 정원과 맞닿은 후면부는 빈티지한 느낌의 꽃무늬 패턴 벽지를 붙이는 등 전원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오르에르 아카이브는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을 표방한다
다음으로는 층별 콘텐츠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자. 3층 ‘오르에르 아카이브’는 무언가를 판매하는 상점보다 일종의 컬렉션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원래 3층은 스튜디오 ZgMc 사무실로 활용하던 공간이다. 1970~1980년대 한국 양옥의 형태를 취한 공간인데, 서양적 라이프스타일이 도입되면서 그런 주택의 상당수가 사라졌다. 그런데 나는 그와 같은 주택 양식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한국 주택의 원형적인 모습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젊은 친구들에게는 예스러운 멋을 뽐내는 공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3층을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미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공간은 추억을 소환하도록 유도하거나 한국 주택의 멋을 재인식하도록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공간에 들어섰을 때 경험하는 향, 인테리어, 음악 등을 세심하게 연출한 공간이 바로 오르에르 아카이브다.
포인트 오브 뷰는 다채로운 문구류를 선보이는 편집숍이다
다시 성수동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여러 공간을 기획・운영해온 관점에서 성수동은 어떤 동네인가.
다른 동네의 경우 젊은 상인이나 디자이너가 자리 잡았을 때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젠트리피케이션이 전개됐지만, 이 동네는 공장 운영주가 건물주인 경우가 많아 점진적으로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오르에르 맞은편에는 오토바이 판매점이 있고, 왼쪽에는 미용실, 오른쪽에는 노래방이 있다. 촌스럽다고 여길만한 곳들이 공간을 에워싼 모양새인데, 처음에는 그런 곳들이 주변에 있는 게 싫었다. 그런데 막상 공간을 운영하니 방문객들이 미용실 간판 절반, 오르에르 외벽 절반을 구도 삼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예스러운 요소와 세련된 요소가 공존하는 모습 자체를 성수동의 매력으로 여긴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 동네는 준공업지역의 거칠고도 육중한 질감, 20세기의 향수를 머금은 건축물과 간판, 세련된 감성의 문화공간이 모두 공존하는 곳이다.
비교적 근래에 디렉팅한 W×D×H 역시 연무장길에 자리 잡았다. 성수동 안에서도 특히 연무장길에 주목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성수일로와 만나는 초입부터 동일로까지 연무장길의 총 길이는 신사동 가로수길과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가로수길에 비해 연무장길은 유독 길게 느껴졌다. 가로수길 주변에는 구경거리가 많아 멀다는 느낌을 받을 틈이 없었던 반면, 옛 연무장길 주변에는 눈을 둘 만한 문화공간이 없어 아득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임대 규모의 장점, 서울숲과 가깝다는 입지적 장점 등을 고려하면 문화공간이 집적될수록 연무장길이 매력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 거리가 부품 제조업에 특화된 곳이었다면 방문객이 관심을 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연무장길에는 가죽이나 수제화 관련 업체가 자리 잡아 대중도 어렵지 않게 터줏대감 공간들을 드나들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선보이는 편집숍이나 카페가 조화롭게 정착하면 선순환을 이룰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최근에는 구두공장을 운영하시는 분들이 1층에 쇼룸을 만들어 방문객과 소통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결론적으로 전통적인 요소와 새로운 요소가 공존하며 지역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가면 좋겠다. 수제화거리에 새로운 공간이 들어서서 젠트리피케이션을 유발하고, 기존의 산업 요소가 전부 사라지는 상황은 원치 않는다. 대신 연무장길 주변 건물의 2층과 3층에서는 기존과 마찬가지로 수제화 관련 공장이 활발하게 영업하고, 1층이나 지하에는 해당 업체의 쇼룸이나 디자인 공간, 카페 등이 들어서서 특색을 유지하면서도 점진적으로 변화를 이뤄가길 바란다. 그 결과 방문객이 늘어난다면 서로에게 좋지 않겠나. 연무장길은 그런 건강한 변화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곳이기 때문에 흥미롭다.
※ 본 콘텐츠는 《아는동네 아는성수》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