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동네 아는강원 1》 미리보기 #2

크래프트, 로컬라이즈, 슬로 라이프

한종호|

이제는 강원의 시대다. 해수욕장, 횟집, 콘도, 단체 관광 등으로 대표되는, 여름 한철 피서지로만 여기던 이곳이 달라졌다. 청정 자연환경, 풍부한 역사・문화 자원, 근대산업유산을 기반으로 새로운 지역 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안전하고 친환경적인 로컬 푸드, 지역의 개성을 담은 크래프트 문화, 일과 휴식이 균형을 이루는 슬로 라이프를 제안하는 청년 창업가들이 곳곳에 자리 잡았다. ‘차별과 소외의 땅’이었던 강원도는 그들과 함께 매력적인 미래의 라이프스타일을 실험하는 ‘기회의 땅’으로 주목받고 있다. 젊은 층의 이탈, 저출산, 급속한 고령화 때문에 대부분의 지방 소도시가 소멸 위기에 처한 지금 강원도는 느리지만 꾸준히 변하고 있다.



테라로사 경포호수점

ⓒ 강필호


강릉-양양 끌고, 속초-고성 밀고

강원도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하고 뚜렷한 곳은 북한 접경 지역인 최북단 고성에서부터 속초-양양-강릉-동해-삼척까지 여섯 개 시군으로 이어지는 동해안 일대다. 지난 수년간 강원도 로컬 신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을 꼽는다면, 동해안 도시에서 시작돼 강원도 전역으로 퍼져가는 ‘슬로 라이프 트렌드’를 빼놓을 수 없다. 이런 흐름의 기폭제가 된 것이 강릉의 커피 그리고 양양의 서핑이다.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공장과 테라로사에서 로스팅한 스페셜티 커피의 가치를 이해하고 즐기는 이들이 하나둘 강릉으로 모여들었다. 이 카페들을 중심으로 강릉은 커피로 표상되는 ‘힙’한 도시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런 흐름은 강릉 명주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젊고 진취적인 문화 트렌드와 맞물려 도시 전체에 창조적 에너지가 넘치게 한다. 강릉과 인접한 양양에서는 2000년대 후반부터 소수 애호가를 중심으로 서핑 문화가 서서히 형성되더니, 2010년 이후 폭발적인 양상으로 서핑 붐이 일기 시작했다. 젊은 층이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의 상징과 같은 서핑 문화 확산은 양양의 상권에도 영향을 끼쳤다. 서핑의 메카인 죽도해변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간 디자인과 레시피를 뽐내는 독특한 골목 상권이 만들어졌다.



소규모 가게들로 채워진 강릉 명주동 골목


강릉과 양양에서 태동한 힙한 생활문화의 에너지는 속초와 고성으로 북진하는 양상이다. 속초에는 속초중앙시장 좌우로 동명동 일대와 교동 일대에 독자적인 골목 상권이 형성되고 있다. 독립서점 겸 게스트하우스 완벽한 날들과 복합문화공간 칠성조선소가 그 대표적인 예다. 한편 고성에는 글라스하우스가 자리 잡은 천진해변과 아야진항을 축선으로 문화 이주민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소 느리지만 변화의 조짐은 동해, 삼척 등 강릉 이남 도시에서도 눈에 띈다. 이러한 동해안 지역의 지각 변동은 춘천, 원주 등 전통적으로 문화 토양이 두꺼운 영서 내륙 도시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더 나아가 태백, 정선, 평창 등 강원도 남부 고원 지역에도 청년이 찾아들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

이런 흐름에는 수도권 접근성이 크게 개선된 것도 한몫했다. 상습 체증을 빚는 영동고속도로의 트래픽을 분산할 서울양양고속도로가 2009년 서울-춘천 구간에 이어 2017년 춘천-양양 구간까지 완전히 개통됐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서울역에서 강릉까지 2시간 이내에 도달할 수 있는 고속철도가 개통하며 동해안은 실질적으로 수도권의 일일생활권에 속하게 됐다. 그러나 물리적 인프라만으로는 변화의 배경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강원도를 바꿔가는 가장 강력한 힘은 사람이다. 지역의 내재가치를 찾아내 로컬 브랜드로 만드는 ‘로컬 크리에이터’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전통적 생계형 창업에 머물지 않고 유기농법과 로컬 푸드, 공유경제와 슬로 라이프 등 미래 문명 가치를 구현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시도하며 지역의 변화를 이끌어간다. 이들은 강원도를 항구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도시 생활과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일시적 휴식처뿐 아니라, 슬로 라이프라는 대안적 삶의 모델을 구현할 테스트베드로 보는 것이다.



上: 속초 칠성조선소

下: 속초 오경아 정원학교


크래프트, 로컬라이즈

산업혁명이 발흥하던 19세기 말 영국에서는 기계로 대량 생산한 제품의 조악함에 환멸을 느껴 수공업을 통해 생활 속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아트 앤드 크래프트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와 존 러스킨(John Ruskin)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그로부터 150년 정도 지난 지금 예술, 디자인, 공예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손으로 만든 것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문화가 강원도 곳곳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이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를 좁혀 자신이 이해하는 생활 세계 속에서 생산된 것을 먹고 마시고 소비한다는 ‘로컬라이즈(localize)’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속초에서는 할아버지 때부터 운영했던 선박 수리소를 리모델링해 갤러리와 카페로 만든 칠성조선소의 최윤성, 백은정 부부가 미국 디자인 학교에서 공부한 카누・카약 제작 방식을 전수하는 프로그램을 열었다. 플랜테리어와 함께 주목받는 유럽식 가드닝의 권위자인 오가든스 오경아 대표 또한 속초에서 신진 가드닝 디자이너를 육성한다. 최근에는 오경아의 정원학교를 졸업한 디자이너 몇몇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양양에서 공동 텃밭 방식의 공유가든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한편, 디자이너 출신 조명진 작가는 동해시의 옛 이름을 딴 묵호사진관을 열어 흑백사진을 찍고 이를 액자에 넣어준다.



평창 브레드메밀


로컬 푸드, 슬로 라이프

강원도 면적은 전 국토의 6분의 1을 차지할 만큼 넓지만 80% 이상이 산악 지형이라 대규모 산업단지를 구축하거나 대량으로 작물을 생산하기가 어렵다. 설령 생산하더라도 물류 비용이 높아 경쟁력이 낮을 수밖에 없다. 이런 자연 조건은 산업화시대엔 강원도의 경제 성장을 제약하는 약점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이를 역이용해 로컬에 특화된 안전하고 친환경적인 먹거리를 만드는 사람도 많아졌다. 평창올림픽시장에 자리 잡은 브레드메밀 최효주 대표는 평창에서 생산되는 ‘쓴 메밀’을 재료로 빵을 만든다. 달걀, 치즈, 방울토마토 등 부재료도 가급적 근처 농장에서 생산된 것을 사용한다. 한편 커피의 바통을 이어받아 강릉에서 수제 맥주 문화를 만들어가는 버드나무브루어리 전은경 대표도 있다. 지역에서 생산된 쌀과 곤드레 등의 재료로 풍미를 살릴 뿐 아니라 맥주의 원재료인 홉을 국산화하기 위해 위탁 농사까지 시작했다. 1926년에 지은 강릉 탁주공장 건물을 리모델링한 버드나무브루어리는 공간 자체만으로도 명소다.



살롱 드 노마드

ⓒ 김상구


경쟁과 줄 세우기에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강원을 찾는 사람들은 슬로 라이프, 즉 ‘느린 삶’을 추구한다. 야근과 회식에 찌든 몸을 일으켜 새벽부터 내달리는 삶에서 벗어나 휴식하고 싶어 하는 이들과 좋아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며 이를 평생의 업으로 삼으려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자연스레 이들을 위한 공간도 하나둘 생겨나는 추세다. 혁신적 창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연결해주고, 그 연결을 통해 새로운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이다. 춘천에서는 살롱 드 노마드(salon de nomad)와 제일약방이 각자의 특성을 유지하며 지역 크리에이터 사이에서 네트워킹 허브 역할을 수행한다. 2018년 태백 하장성 마을에 문을 연 무브노드(MOVE.NODE)는 김신애 대표의 탁월한 기획력에 힘입어 막장책방, 희망갤러리 등 새로운 공간으로 이어졌다.



이제 강원도는 매력적인 기회의 땅으로 주목받는다

ⓒ 서피비치


지난 10년 사이 강원도는 관광지로서 다소간 침체기를 거쳤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4년간 동해안을 찾는 관광객 수가 전국 평균 대비 정체 혹은 감소 추세를 보였다. 특히 동해안 중에서도 강원권 동해안이 차지하는 비중이 소폭 감소했다. 축제 같은 문화 자원이 많지 않고 주로 산과 바다, 해변, 경관도로 등 경관 자원으로만 버텨온 탓이다. 관광산업도 펜션・모텔・민박 같은 전통적 숙박업에 치중됐을 뿐 아니라 맛집이나 특산물 가게, 즐길 거리를 제공하는 업체가 많지 않았다. 특히 밀레니얼이 즐길 만한 도시 콘텐츠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보석처럼 하나둘 생겨난 작은 가게와 공간들이 강원도의 매력을 조금씩 키워가는 중이다. 강원도 열여덟 개 시군이 가진 역사적・산업적・생태적 자원을 활용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청년 창업가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가온 우리의 미래를 강원도에서 미리 선보이고 있다. 



※ 본 콘텐츠는 《아는동네 아는강원 1》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

에디터

* 편집자: 아는동네

한종호

언론사 기자, 인터넷 포털 기업 임원을 거쳐 2015년부터 춘천에서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로컬의 디자이너, 메이커, 크리에이터가 주도하는 지역 기반 창업 생태계 조성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