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낙원

강릉 : Cinema Paradise

조윤|

바다와 소나무 그리고 커피의 도시, 강릉. 이 도시가 지닌 낭만을 한층 짙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바로 영화다. 시내에는 지역민이 힘을 보태 세운 영화관이 있고, 매년 여름이면 바닷바람을 가득 머금은 영화제가 열리며, 때로는 어느 영화의 배경이 되어 스크린을 수놓는 곳. 어쩌면 강릉은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가장 가까운 낙원일지도 모른다.

ⓒ정동진독립영화제 


시네마천국 연대기 

강릉은 오래전부터 ‘사람・공간・축제’라는 삼박자를 두루 갖추며 자체적인 독립영화 생태계를 형성해왔다. 이처럼 독립영화가 하나의 정체성으로 어엿이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오랜 세월 같은 온도를 지켜온 영화인의 열정과 시민의 지지가 단단히 버티고 있다.



제 1회 정동진 독립영화제 포스터 ⓒ정동진독립영화제

독립영화 도시의 시작: 강릉씨네마떼끄

강릉의 독립영화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1996년에 시작된 영화 공동체 강릉씨네마떼끄다. 당시 ‘다양성 영화’를 향한 국내 관객의 수요가 늘고 있었음에도, 각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편수와 종류는 한정적이었다. 이는 대안을 추구하는 영화 모임과 영화제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결과를 낳았고, 강릉씨네마떼끄도 이러한 흐름의 일환으로 탄생했다. 초창기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여 비디오를 보던 이들은, 영화가 주는 즐거움을 더 많은 이와 나누기 위해 소규모 상영회나 세미나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여행 가방에 영화 상영 장비를 한가득 챙겨넣고 강원도 곳곳을 누비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들과 같은 시기에 생겨난 단체들이 하나둘 사라져도 강릉씨네마떼끄는 시민과의 접점을 넓히며 꿋꿋이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 여름, 정동초등학교 운동장에 놓인 커다란 합판을 스크린 삼아 공식적인 첫 영화제가 열렸다. 강릉 독립영화계의 상징이 된 정동진독립영화제의 시작이었다.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 정동진독립영화제 

‘영화인의 바캉스’라는 별명답게 정동진독립영화제는 매년 수천 명의 관객을 불러 모으며 강릉 일대를 활기로 가득 채운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관객들이 아득히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배경 삼아 영화를 관람하는 모습은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관객이 직접 인상적인 작품에 동전으로 투표하는 ‘땡그랑 동전상’, 모기장이 설치된 특별석을 제공하는 ‘로얄석의 유혹’ 등 영화제를 장식하는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 역시 매번 이곳을 찾게 하는 매력 중 하나다. 한편 해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900여 편의 공모작 중에서 상영작을 고르는 기준은 예상외로 무척 간단하다. 첫째, 담벼락이 없는 정동초등학교 특성상 관객 통제가 불가능하니 전체관람가일 것. 둘째, 야외에서 보았을 때 그 매력이 배가될 것. 즉, 작품성이나 예술성보다 ‘누구나 즐겁게 관람할 수 있는 영화인가’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셈이다.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은 강릉씨네마떼끄 박광수 사무국장은 이에 대해 “우리가 상영하는 영화가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첫 독립영화일 수 있기에, 문턱이 낮은 영화를 상영하려 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2018년 20주년을 맞은 정동진독립영화제는 그동안 분리되지 않았던 집행위원회와 작품선정위원회를 편성했다. 투어 프로그램 ‘정동진 씨네바다 여행’과 영화감독들이 함께하는 워크숍 ‘5교시 영화 수업’ 등 낮 시간을 활용한 프로그램도 같은 해 처음 시도했다. 규모가 커짐에 따라 영화제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방법과 함께 관객이 영화제를 한층 적극적으로 즐길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크고 작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한결같은 태도로 영화와 관객을 대했기에, 앞으로 이들이 보여줄 새로운 시도 또한 믿어볼 법하다. 

정동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 ⓒ정동진독립영화제


굴곡진 사연을 품은 스크린: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

2012년, 강릉 독립영화계는 또 한 번 전환점을 맞는다. 오랫동안 지역의 랜드마크였지만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신영극장이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이하 신영)’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것이다. 1960년대에 개관한 신영극장은 한때 강릉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지금까지도 거의 모든 시내버스가 극장 이름을 딴 정류장을 거쳐간다는 사실에서 과거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초 멀티플렉스의 시대가 찾아왔고, 이러한 흐름을 피하지 못한 신영극장은 2009년 여느 지역 극장과 마찬가지로 문을 닫고 말았다. 3년 후, 안정적으로 영화를 상영하기 위한 공간을 모색하던 강릉씨네마떼끄는 폐관 이후 그대로 비어 있던 신영극장을 독립・예술 영화 전용 극장으로 재탄생시켰다. 신영은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상영하지 않는 국내외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두루 소개하며 강릉을 넘어 강원도 전역의 관객에게 한층 더 폭넓은 선택지를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난 신영의 운명 또한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2016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영향으로 정부의 보조금 지원이 끊기면서 기약 없는 휴관을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명맥이 끊길 만큼의 타격이었지만, 이듬해 봄 강릉시의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면서 신영은 기적적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이처럼 기초자치단체가 독립・예술 영화 전용관을 지원한 것은 전에 없던 특수한 사례다. 시의 지원만큼이나 든든한 힘이 된 것은 시민의 지지였다. 시민이 좌석을 구매하는 형식으로 후원하는 ‘나는 주인이다’ 프로젝트를 통해 극장의 임대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비록 당시 후원자들의 이름을 새겼던 좌석은 내부 리모델링을 거치며 사라졌지만, 극장 로비 한편에는 여전히 그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벽면이 남아 있다. 이렇듯 숱한 이의 손길로 다시 일어선 신영은, 영화 애호가의 아지트이자 지역민을 위한 문화・예술 거점으로 자리를 지켜간다.



걸어온 길에서 걸어갈 길로

2017년 강릉시는 평창동계올림픽 이후의 도시 비전을 ‘독립영화 도시’로 선포했다. 이와 함께 시작된, 독립영화계를 향한 강릉시의 지원은 신영의 재개관을 도왔을 뿐 아니라 지역 내 영화인 네트워크를 공고히 하는 계기도 마련했다.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 같은 해 창립한 사회적 협동조합 인디하우스(INDIEHOUSE)다. 강릉에서 활동하는 영화인과 정책 연구자 등이 모여 만든 이 단체는 영화제작지원이나 교육사업처럼 전문 인력과 체계가 필요한 일을 도맡는다. 인디하우스 외에도 미디어협동조합 이와, 강릉시영상미디어센터 등이 각자의 자리에서 영화와 사람 사이의 연결점이 되어주고 있다. 몇 년 전까지 강릉씨네마떼끄 홀로 지역의 독립영화계를 짊어졌다면, 이제는 짐을 나누어 들 동료가 제법 생긴 셈이다. 박 사무국장은 이러한 움직임을 두고 “강릉의 영화인이 바라볼 수 있는 내일이 생긴 것”이라 말한다. 물론 강릉시의 적극적인 지원이 얼마나 이어질지 미지수이고, 더욱더 촘촘한 체계와 정책이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발걸음이 시작된 이상, ‘독립영화 도시’라는 타이틀은 강릉의 비전이 아닌 현실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 본 콘텐츠는 《아는동네 아는강원 1》 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


에디터

조윤

yjo@urbanpl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