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로 끝자락의 작은 페인트 가게에는 동인천의 흥망성쇠를 삶의 일부로 겪어낸 이가 있다. 최명선 화백은 과거 동인천 극장가에서 극장 간판 화가로 활동했다. 극장가의 열기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고 간판의 손 그림을 컴퓨터 그래픽이 대체할 때도 최 화백의 붓질은 인천 구석구석에 자취를 남기며 이어졌다. 그의 캔버스가 높다란 극장 간판에서 원도심의 잿빛 벽으로 바뀌었을지언정, 붓끝에 스민 젊은 열정만은 변할 줄 모른다.
최명선 화백
극장 간판 그리는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학창 시절 취미로 만화를 베껴 그리곤 하다가 그림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서울 아현동의 만화 골목으로 갔다. 막상 만화를 배워보니 조그만 칸 안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게 영 답답하고 적성에 맞지 않더라. 그래서 열아홉 살 무렵에 고향 인천으로 돌아와 극장 간판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영화 보는 걸 워낙 좋아한 데다 커다란 극장 간판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당시 극장에는 간판 화가들로 이뤄진 ‘미술부’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화가를 ‘미술부장’이라 불렀다. 나는 인천 시내 극장에서 미술부장을 돕는 조수로 일하게 됐다. 처음에는 팔레트 닦기 등 잔심부름만 시키고 그림엔 손도 못 대게 하더라. 그래서 미술부장이 퇴근한 후 몰래 캔버스에 데생 연습을 하곤 했다.
일반적인 회화 작업과 구분되는, 극장 간판 작업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극장 간판 작업은 일종의 종합 미술이다. 간판 하나를 그리려면 인물과 풍경을 두루 그릴 수 있어야 하고 붓글씨 쓰는 능력도 필요하다. 제목과 출연 배우는 물론이고 간략한 줄거리까지, 간판 안에 2시간 분량의 영화를 축소해 집어넣어야 하니까. 주인공 얼굴을 양쪽에 크게 그린 후 조연과 배경은 중앙에 그리는 사다리꼴 구도가 일반적이었다. 당시 간판 화가들은 인물 담당, 배경 담당 등으로 역할이 나뉘기도 했는데, 나는 어느 정도 숙련된 이후로 조수 한 명과 함께 간판 하나를 도맡아 그렸다. 요즘은 간판이든 영화 포스터든 컴퓨터로 금방 만들어 인쇄할 수 있지 않나. 물론 이 방법이 간편하지만 손으로 그린 것과는 천지 차이다. 손 그림은 자로 잰 듯 딱 떨어지지 않을지언정 생동감과 묵직한 멋이 느껴진다.
최 화백의 페인트 가게 한편에는 그의 작업물들이 소중히 기록돼 있다
1980년대까지 간판 화가는 고급 인력으로 여겨졌다. 전성기를 회고한다면.
당시 인천에 극장이 참 많았다. 특히 중심가였던 동인천 지역에 모여 있었다. 미림극장(지금의 ‘추억극장 미림’), 애관극장, 인형극장, 키네마극장, 동방극장 등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극장은 많은데 간판 그리는 사람은 두세 명뿐이라 무척 바빴다. 보통은 한 극장과 계약을 맺고 일하는데, 나는 인형극장을 메인 작업장으로 두고 추가로 극장 두세 곳을 돌며 간판을 그리곤 했다. 젊을 때라 힘이 넘치기도 했고 워낙 작업 의뢰가 많이 들어왔으니까. 인천뿐 아니라 서울, 부천, 구리까지 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극장 간판 작업과 관련해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나.
부평 대한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던 시절에 가수 윤수일 씨가 그곳에서 쇼를 연 적이 있다. 내가 쇼 간판을 그렸는데, 나중에 직접 찾아와 자기 얼굴을 잘 그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더라. 가끔 영화감독이나 영화사 직원들이 자기네 배우 얼굴 좀 잘 그려 달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간판에 그려진 얼굴 크기가 곧 인기의 척도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1990년대 후반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기존 극장들이 위기를 맞았다. 당시 상황은 어땠나.
멀티플렉스가 들어오면서 단관극장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나마 내가 근무하던 인형극장은 상영관이 세 개라 조금 더 오래 유지됐지만, 상영관을 일고여덟 개씩 갖춘 멀티플렉스에 비해 관객 수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터넷으로 포스터를 확인한 후 영화표를 예매할 수 있게 되니 극장 간판의 존재 이유가 없어졌다. 결국 2002년에 인형극장이 문을 닫았고, 나도 그때 극장 간판 일에서 손을 뗐다.
'개항로 프로젝트'의 예스러운 간판 역시도 최 화백의 작품이다
그 후로는 어떻게 생계를 이어갔나.
나는 배운 게 그림뿐이니 붓을 놓지 않았다. 경동에 조그맣게 페인트 가게를 열어 주로 건물 벽을 칠하거나 벽화 그리는 일을 했다. 극장 간판을 작업하며 쌓은 경험 덕분에 넓은 면적에 그림 그리는 일도 수월히 해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중구청 벽화 담당자로 발탁돼 송월동 동화마을, 차이나타운, 월미도 등 중구 곳곳에 벽화를 그렸다. 특히 송월동 동화마을은 처음 조성될 때부터 내가 주로 작업해온 곳이다. 지금도 그곳에서 칠이 벗겨진 그림을 보수하거나 새로운 벽화를 그리고 있다. 이 지역에서 간판 화가로 활동하던 사람들 중에 아직까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아마 나뿐이지 싶다. 그러니 나라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계속하려 한다.
40여 년간 인천 곳곳에 손길이 닿았다. 거리에서 본인의 그림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나.
흐뭇하고 참 좋다. 동네 여기저기에서 내 그림을 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뿌듯하다. 옛날에는 “그림 그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빌어먹으며 산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꾸준히 한 우물을 파니까 어떻게든 생계가 이어지더라. 물론 나는 미술을 정식으로 배우지도 않았고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이곳저곳 다니며 익힌 손재주와 눈썰미 덕분에 어떤 그림이든 그릴 수 있다. 극장 간판을 그린 이들 가운데 순수미술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 경력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난 간판 화가였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극장 간판도 예술의 한 종류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이전에 작업한 간판들을 작은 캔버스에 옮겨 다시 그려볼까 한다. 그 그림들을 모아 죽기 전에 전시회라도 열고 싶다. 생업에 바빠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지만. 난 아직도 그림 그리는 일이 참 좋다.
※ 본 콘텐츠는 《아는동네 아는인천 1》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