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동네 아는인천 1》 미리보기 #7

파란만장 인천 야구 연대기

김은식|

‘구도(球都, 야구 도시)’는 인천 지역의 야구팬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단어 중 하나다. 대개 부산 지역 야구팬과 입씨름을 벌일 때 등장하곤 하는데, 한국 야구의 중심이 과연 어디인가에 관한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야구란 종목에서 대체로 승패와 빈볼 시비가 하루하루의 쟁점이라면, ‘구도 논쟁’은 경기가 없는 월요일이나 맞대결이 없는 기간에도 불씨를 이어가는 중장기 쟁점이다.



2010년대 SK 와이번스의 에이스 투수인 김광현 선수의 역투 장면

ⓒ SK 와이번스


구도 논쟁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0년대 초반 이후 부산이 대한민국에서 야구 열기가 가장 뜨거운 곳이라는 건 인천 야구팬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인천이야말로 한국 야구의 발상지이며 가장 오랫동안 야구를 사랑해온 도시라는 것이 인천 사람들의 항변이다. 게다가 그들은 ‘구도’라는 수식어로 가장 먼저 불린 곳이 인천이며, 가슴속에 불타는 야구 열정만은 부산 사람들보다 뜨겁다고 주장한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인천 연고의 신생팀 SK 와이번스(SK Wyverns)와 부산 연고의 한국 프로야구 최장수 구단 롯데 자이언츠(LOTTE Giants)가 나란히 침체기에서 벗어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기에 이런 기 싸움은 불가피했다.



근대 야구 도입기에 주요 경기가 펼쳐진 훈련원


서양의 낯선 공놀이가 국민 스포츠로 거듭나기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반도에 야구가 전해진 지는 100년이 조금 넘었다. 19세기 말엽 한국에 들어온 미국인과 일본인이 공터에서 캐치볼을 하며 무료함을 달랜 것이 그 시작이고, 미국인 선교사 필립 L. 질레트(Phillip L. Gillette)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회원으로 구성된 팀을 만들어 야구를 가르친 1904년이 ‘한국인이 야구를 시작한’ 시점이었다. 한 해 뒤 미국인 선교사에게 야구를 배운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일본인 교사에게 야구를 배운 관립중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 청년들이 벌인 맞대결은 한국 야구 최초의 공식 경기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꽤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에게 야구란 그저 ‘낯설고 신기한 서양식 놀이’일 뿐이었다. 서울의 동대문 훈련원 터나 인천의 응봉산 웃터골(지금의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에서 야구 경기가 열릴 때면 적지 않은 군중이 모여들기도 했지만, 야구의 복잡한 규칙과 미묘한 매력을 이해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저 수십 명의 청년이 모여 작은 공을 던지고, 방망이로 때리거나 땀나게 뛰어다니는 신기한 몸짓을 구경했을 뿐이다. 1940년대에는 나름대로 응원 열기가 뜨거웠고 경기 내용에 흥분한 관중이 그라운드로 난입하는 일마저 벌어졌다. 하지만 그것 역시 야구 자체에 대한 열정이라기보다 ‘일본인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합법적이고도 유일한 기회’에 몰입한 사례일 뿐이다.



1896년 미국인이 벌인 국내 최초의 공식 야구 경기가 진행된 모화관 터(지금의 독립문 자리)


근대 스포츠의 단체 경기 중 한국인에게 가장 먼저 사랑받은 것은 오히려 축구였다. 축구는 야구와 달리 경기 규칙이 직관적인 데다, 손보다 발을 쓰는 점에서 전통 놀이 문화와의 유사성도 컸다. 게다가 야구보다 장비나 기술의 문턱도 비교적 낮아 배트, 글러브, 헬멧 따위 없이도 공 하나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또한 자세히 배우지 않더라도 체력과 투지와 약간의 요령만 있으면 공과 함께 상대 골문을 향해 돌진이 가능했다. 경기 방식과 기술을 익힌 지 불과 10여 년 만에 한국 축구가 일본 축구를 압도할 만큼 성장한 것이나, 일제 강점기 내내 경평대항축구전(경평전)을 비롯한 지역・학교 간 축구 라이벌전이 열기를 뿜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해방 이후 야구가 축구보다 한발 앞서서 전국 단위의 대회를 열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유별나게 야구를 좋아하면서도 축구에 통 관심이 없던 미군 장병들 덕분이었다. 전쟁 중에도 야구용품을 보급해 부대 대항 야구대회를 진행한 극성맞은 미군은 저마다 부대 근처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팀을 섭외해 연습 경기를 치렀다. 그런가 하면 기념일에는 한국의 국가대표팀 결성을 독려해 주한 미군 대표팀과의 A매치를 열어 한미 동맹의 상징으로 삼았다. 게다가 그들은 남아도는 야구용품을 무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당시 국내 기술로는 제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야구공 몇 상자를 증여받은 뒤, 이를 담보 삼아 대출받은 돈으로 시작한 것이 최초의 전국 대회인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였다. 그 덕분에 해방 무렵 일본인이나 미국인과의 접촉이 잦았던 인천과 부산 그리고 서울을 중심으로 야구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외 지역에 살던 시민 대부분은 야구의 ‘야’ 자도 들어보지 못한 시절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1972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한 군산상업고등학교의 세리머니

ⓒ 연합뉴스


야구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것은 다시 한참의 세월이 흐른 1970년대 중반이었다. 1972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군산상업고등학교는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수도권과 영남권 밖의 학교로서 우승을 일궈냈는데, 그것도 9회 말 3점 차의 열세를 뒤집는 극적인 끝내기 역전승이었다. 이때 불붙은 야구 열기는 호남권과 충청권으로 번지며 ‘전국적인 야구의 대중화’와 ‘지역 대결 구도’를 이뤄냈다. 지속 가능한 대결 구도가 한번 자리잡히자, 당시 대부분의 야구대회 본선이 열렸던 동대문야구장에는 매일같이 팔도 각지 출신의 열혈 팬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를 발판 삼아 10여 년 뒤에는 프로야구가 창설되었고, TV와 라디오 중계방송이 전국적으로 송출되면서 야구는 명실상부한 ‘국민 스포츠’ 자리에 올라섰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 펼쳐진 삼미 슈퍼스타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

ⓒ 연합뉴스


인고의 세월

문제는 이런 한국 야구사의 흐름과 엇박자를 밟아온 것이 다름 아닌 ‘인천 야구’라는 점이다. 인천은 일본인 집단 거주지와 미군 주둔지가 있던 도시였기에 지역 학생과 청년이 일찍부터 야구를 접하고 배웠으며, 이들은 1950년대 내내 각종 전국대회를 휩쓸었다. 더 나아가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지역 출신 국가대표팀 주축 선수들과 지도자를 다수 배출하며 ‘구도’ 타이틀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냉전 질서의 장기화로 중국과의 교역이 끊기며 인천항의 위상은 반토막이 나버렸고, 같은 시기 인천 지역이 겪은 경제 위기는 학생 스포츠 영역까지 여파를 미쳤다. 게다가 인천 지역의 전도유망한 학생들마저 지척에서 무섭게 팽창하던 서울 지역 학교로 전학을 가버리는 통에, 1970년대 인천 야구는 전국대회 정상권을 감히 넘보지도 못하는 변방으로 빠르게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1970년대의 고등학생 선수들이 대학 졸업 후 성인 야구에 뛰어들 무렵 갑작스럽게 프로야구가 출범한 일 역시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1982년 청와대의 기획과 지시에 따라 프로야구 출범을 민첩하게 준비하던 이들은 “전국을 여섯 개 권역으로 나눈 뒤 각 지역을 연고로 여섯 개 야구팀을 만들며, 모든 성인 선수들을 출신 고등학교 소재지를 기준으로 선발한다”는 방침을 제시했다. 즉, 전라북도 군산의 군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는 모두 해태 타이거즈(HAITAI Tigers, 지금의 기아 타이거즈) 선수가 되어야 하고, 부산의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는 모두 롯데 자이언츠 선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인천에는 전통의 명문 인천고등학교와 동산고등학교가 있었지만, 195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선수들은 선수로서는 물론이고 지도자로서도 은퇴한 지 오래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인천을 연고로 창단한 삼미 슈퍼스타즈(SAMMI Superstars)가 입단 교섭을 할 만한 선수 중 국가대표 경력이 있는 경우는 고작 서너 명 정도였다. 그나마도 그들은 군 복무 중이거나 같은 해 가을에 치러질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을 위해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어 프로 무대에 오를 수 없는 처지였다. 결국 선수 명단을 채우기조차 힘들어 일반인을 대상으로 오디션까지 열어가며 구색을 갖추고 나서야 시즌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천 연고의 삼미 슈퍼스타즈가 남긴 승률 1할대의 전설적인 ‘꼴찌 신화’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현대 유니콘스(HYUNDAI Unicorns)는 인천 연고 구단으로 프로야구에 입성했으나, 2000년에 연고지를 옮기면서 인천 야구팬에게 상처를 남겼다

ⓒ 연합뉴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고지 출신 선수로만 중심 전력을 구성해야 한다는 규정은 1990년대까지 유지되었는데, 학생야구의 체질이 단숨에 개선될 수 없으므로 자연히 프로 구단의 체질 역시 건강해지기 어려웠다. 게다가 삼미를 비롯해 인천을 연고로 프로야구 무대에 뛰어든 기업들은 대개 자금력이 빈약해 다른 팀의 주축 선수들을 과감하게 데려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결과 인천 연고 프로야구 구단은 1980년대 내내 여덟 번의 시즌 중 다섯 번이나 꼴찌를 기록했다. 여기에 더해 2000년 SK 와이번스가 창단하기까지 무려 네 번의 구단 매각과 연고지 이전을 겪었다. 다섯 번이나 간판이 바뀐 어수선한 사정 역시 크게 보면 앞서 서술한 여러 사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인천의 야구팬이 한동안 ‘야성’을 잃어버린 것은 인천 연고 팀들이 야구를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4~5년에 한 번씩 주인이 바뀌어 들고 나기를 되풀이하다 보니 마음 붙일 틈을 찾지 못해서였다. 

2000년대 중반에 뜬금없이 구도가 어디냐는 쟁점이 떠올랐을 때, 인천보다 부산의 손을 들어주는 타지인이 많았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천이 한국 야구의 중심일 때 다른 지역 사람들은 야구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다른 지역 사람들이 야구에 열광할 때 인천은 ‘꼴찌의 상징’으로 전락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지인은 2000년대 후반에 갑자기 떠올라 프로야구판의 강자로 군림하기 시작한 SK 와이번스 왕조를 ‘졸부’ 취급했고, 이러한 시선은 인천 사람들이 반세기 넘게 묵묵히 지켜온 자부심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



창단 이래 4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아 인천 야구의 자존심을 회복한 SK 와이번스

ⓒ SK 와이번스


한국 야구 100년사, 그리고 인천 야구

한국 야구의 역사가 100년이 조금 넘었다고 표현했지만, 그 100여 년은 식민지 시대, 전쟁, 고속 성장, 군사 독재, 시민혁명 등 세계사적으로도 흔치 않을 극적인 고비들을 숱하게 넘기며 이뤄낸 시간이었다. 따라서 한국인에게 야구란 ‘고작 100년쯤 된 친구’이기도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함께한 친구’이기도 하다. 긴 세월 속에 가물가물하지만 잊히지 않은 어느 굵직한 대목이 인천이라는 도시와 얽혀 있고, 그것을 유독 생생히 기억하거나 그 기억을 물려받은 이들이 바로 인천의 야구팬이다. 

‘구도’의 명성은 인천에서 시작해 어느 시점에선가 부산으로 넘어갔지만, 10여 년 전부터 다시 인천과 부산이 공유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구도라는 상징적인 타이틀이 과연 누구의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 야구가 어제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원래부터 이어진 것도 아니며, 피와 땀과 눈물, 숱한 삶과 죽음, 이별과 만남의 사연으로 점철된 우리네 현대사와 함께 태어나 흘러온 우리 문화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물론 그중 많은 이가 잊고 있으나 가볍지 않은 한 대목을 차지하는 것이 인천 야구다. 오늘날 SK 와이번스가 관객 친화적인 구장 시설과 완성도 높은 서비스를 바탕으로 프로야구 구단 운영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모습 역시 뿌리 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행운이 결코 아니란 사실도 되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김은식(자유기고가)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공부하면서 글을 쓴다. 야구, 역사, 인물 등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 본 콘텐츠는 《아는동네 아는인천 1》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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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 편집자: 아는동네

김은식

esew@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