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에 화음을 담다

신발연구소

김작가|

‘아내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두 남자, 샘(한우창)과 카일(김정환)의 첫인상은 동료라기보다 밴드 같았다. 서로 다른 소리를 내어 하나의 음악과 화음을 만들어내는. 카일은 제조를 담당한다. 재단과 재봉틀 작업을 맡는다. 가죽, 즉 ‘가피’를 구두 모양으로 만들고 밑창을 붙인다. 샘은 여기에 색을 입히고 광택을 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구두로 완성한다. 카일이 기초화장을, 샘이 색조화장을 맡는 셈이다.


“이 친구(카일)는 집중력이 뛰어나다. 주말에도 가끔 나와서 혼자 수련한다. 새로운 공법도 시도하고. 우직하고 성실하다.”

“샘은 느낌과 감각을 구체화하는 게 뛰어나다. 구두 관련 자료들을 계속 보면서 그걸 자기 색으로 해석하는 능력이 있다. 다른 친구들보다 구두를 보는 감이 탁월하다. 한마디로 창의적이다.”


둘이 꼽는 서로의 장점이다. 남자끼리 면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민망할 법도 한데 서슴없다.



(왼쪽부터) 김정환, 한우창


30대 중반, 성수동에서는 막내급이다. 그래도 ‘짬’은 제법 차이 난다. 샘은 구두 외길 인생이다. 친구 따라 국내 유일의 제화공업과에 입학했다. 구두공장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구두 브랜드 무크(mook)의 MD로 일하던 2006년부터 성수동을 들락거렸다. 몇 년 전 신발연구소로 옮겨 젊은 장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반면 카일은 좀 돌아왔다. 학교를 마치고 무역업에 종사했다. 4년쯤 지났을까. 즐겁지가 않았다. ‘소울’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뭘 만드는 게 좋았다. 대전에서 구두 만드는 걸 배워 거기서 일하다가 2013년 성수동으로 올라왔다. 국내 제일의 수제화 장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수제화 명장 1호 유홍식 장인이 그의 스승이다.

그들이 신발연구소에서 일하기 전, 성수동은 기성 브랜드의 하청업체가 주를 이뤘다. 일반 소비자가 직접 구두를 살 수 있는 매장이 없었다. 변화가 시작된 건 약 5년 전쯤이었다. 수제화거리가 조성되면서 서서히 구두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제화 기술을 배우러 오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신발연구소


그런 변화 속에서 신발연구소는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일종의 이미지였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모든 게 공개되는 시대, 과정을 그럴싸하게 보여주는 건 제품에 대한 충성도를 높인다.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의 구두공방은 인스타그램의 한 컷으로도 손색없었다.

상표 가치를 높이기 위한 고민은 공방이라는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고객을 직접 찾아가서 발 치수를 재고, 미팅 후 제작한다. 완성된 신발은 택배로 발송한다. 구두업계에서는 처음으로 도입한 O2O(Online to Offline) 서비스다. 한 번 측정한 발의 치수와 형태는 고스란히 데이터로 남는다. 지금까지 1만 5,000명의 발 모양이 쌓였다. 이렇게 누적된 데이터는 새로운 제품 개발로 이어진다. 선순환이다. 물론 두 사람이 모든 주문을 소화하는 건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샘과 카일은 새로운 제품을 기획하고 일종의 프로토타입을 만든다. 그 후에는 협력업체, 즉 다른 장인들이 양산을 담당한다.




신발연구소의 공간과 신발 제작 과정은 그 자체로 멋진 볼거리다


성수동 제화산업의 현주소는 어둡다. “OEM 방식인데 물량이 없다. 인건비가 오르면서 기존 브랜드들이 성수동 바깥으로, 한국 바깥으로 발주처를 돌린다. 거기에 젠트리피케이션이 겹친다. 건물주들이 기존 공장 대신 카페를 넣으려 하고, 임대료를 올린다. 10년 전의 매출액과 비교하면 앞의 숫자가 바뀌는 수준이 아니다. 뒷자리에서 ‘0’ 하나가 빠진다.” 성수동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고도성장사회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진작 새로운 시대의 경향에 맞춘 신발연구소는 생존을 위한 진화를 끝낸 셈이다. 기성 브랜드 대신 성수 제화업계에 새로운 역할을 할 준비도.


※ 본 콘텐츠는 《아는동네 아는성수》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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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 편집자: 아는동네

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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