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특별한 철물점에서 시작되는 지역의 변화

정음철물

심영규|

도시와 공간은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아서, 태어난 후 번성의 시기를 거쳐 이윽고 쇠퇴한다. 특히 공간은 도시의 경제적·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1인 가구가 늘고, 저성장시대의 도래와 맞물려 대중의 취향이 변화하며, 밀레니얼이 등장함에 따라 공간 트렌드 역시 빠르게 달라져 왔다. 그러므로 공간을 볼 때는 공간 자체만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포된 사회 변화의 흐름을 살필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시대에 따라 변모하는 대중의 취향과 트렌드를 읽어내고 이에 부합하는 콘셉트와 개성을 갖춘 공간으로 모여들기 때문이다.



공간 트렌드의 변화

한국은 유례없는 경제적 고도성장을 바탕으로 ‘업스트림 (upstream)’ 시대를 거쳐왔으나, 21세기 들어서는 저성장과 인구절벽으로 인한 ‘다운스트림(downstream)’ 시대로 급격히 돌입했다. 사회 전반적인 변화의 흐름에 발맞춰 공간 기획, 개발, 운영에도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때다. 실제로 주거공간은 물론이고 사무공간과 매장, 숙박공간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먼저 주거공간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대중에게 익숙한 주거 형태는 아파트·연립주택·다세대주택으로 분류되는 공동주택과 단독주택 등이 전부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셰어하우스와 코리빙 공간처럼 법적 분류나 기성 공간의 개념 밖에 존재하는 새로운 주거 형태가 생겨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주택의 정의가 크게 달라졌다. 기존에는 면적이나 크기를 기준으로 주택을 분류해왔으나 셰어하우스나 코리빙 공간은 스스로를 크기로 정의하지 않는다. 대신 이러한 공간들은 ‘어떻게 함께 살 것인지’, ‘어떻게 따로 살 수 있는지’를 강조한다. 사실 셰어하우스(share house)라는 용어는 부동산 거품이 꺼진 1990년대 일본에서 먼저 생겼다. 물론 그 개념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국내에는 이와 비슷한 개념의 하숙집이 있었고, 해외에도 침실은 따로 쓰고 화장실·부엌·거실 등을 공유하는 플랫셰어(flatshare)가 존재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미뤄보면, 결국 공간의 물리적 개념이 바뀌었다기보다 주거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맞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무공간, 즉 오피스의 개념도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기업이 사옥을 지으면 내부 공간 구성과 직원 배치가 사내 권력과 위계에 따라 엄격히 정해졌다. 창가 자리는 직급이 높은 임직원의 차지였고, 출입문과 가까운 곳에 신입사원을 배치하는 식이었다. 이처럼 경직된 오피스 환경은 2016년 글로벌 공유오피스 기업인 위워크가 국내 시장에 진출하며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입주사 임직원은 감각적인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라운지에서 회의와 미팅을 진행하고, 구비된 커피나 맥주를 무료로 마실 수 있는 것은 물론이며,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매력적인 행사가 열리면 자유롭게 참여할 수있다. 최근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공유오피스는 대부분 이와 같은 운영 방식을 따르고 있을 뿐 아니라 구조적으로도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중앙부에는 누구든 사용할 수 있는 공용 라운지가 있고, 주변은 지정석과 개인 사무공간으로 분리된다. 그러나 외형적인 스타일과 구성보다 중요한 것은 사무공간의 본질이고, 이는 곧 ‘일하기 좋은 공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근에는 사무공간을 만들거나 택하기에 앞서 자신이 어떤 업무 방식을 추구하는지 되짚어보려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리테일 관련 공간 시장의 변화는 더욱 극적이다. 대형 백화점이나 복합 쇼핑몰의 위세는 이미 예전 같지 않다. 오픈 초기에는 신선하게 느껴지는 공간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금세 식상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품목 선정 못지않게 어떤 방식으로 물건을 보여줄 것인지가 중요해졌다. 게다가 온라인 쇼핑 시장이 점점 커지면서 한 가지 아이템만으로는 하나의 공간을 운영하기도 쉽지 않다. 한정된 쇼윈도에 고정적으로 상품을 진열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필요에 따라 공간을 분리하고 결합해 팝업 형태로 상품을 소개하거나 판매하는 운영 방식이 등장한 이유다. 숙박공간은 어떨까? 본래 숙소는 여행이나 출장으로 찾은 지역에서 하룻밤 묵는 공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요즘은 호텔 그 자체가 방문 목적이 되기도 하는 추세다. 마음에 드는 공간에서 머물며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숙박공간을 찾는 여행객이 많아졌다. 여기에 더해, 이들은 머무는 지역에서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처럼 특색 있는 숙소를 방문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여행자의 니즈를 파악해 알맞은 숙소를 큐레이션해주는 플랫폼 스테이폴리오는 론칭 이래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그만큼 숙박 관 련 서비스 사업자에게는 좋은 공간을 선별하는 안목과 기준이 중요해졌고, 방문객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씻고 자는 것을 넘어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충분한 공간인지의 여부가 중요해진 것이다. 




콘텐츠 공간을 만들다

최근 부동산업계에서는 ‘콘텐츠 부동산’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공급자의 관점에서 움직이던 부동산 시장이 이제는 역으로 사람을 불러들이기 위한 콘텐츠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팝업스토어를 바탕으로 스위트스팟·아크앤북·성수연방·띵굴마켓을 선보인 ‘오티디코퍼레이션’, 일반적인 부동산 임대나 분양을 추진하는 대신 리테일 콘텐츠를 자체적으로 기획해 공간을 구성한 ‘네오밸류’ 등은 이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콘텐츠를 이용해 공간을 채우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단순히 콘텐츠를 덧입히는 데 급급한 공간은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했듯 다수의 공간 사업자들은 공간 트렌드의 변화에 부합하는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기 위해 콘텐츠를 도입하려 한다. 콘텐츠는 스토리, 즉 이야기다. 그런데 이야기를 만들어내거나 축적하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한다. 게다가 공간 콘텐츠는 시의성과 트렌드를 고려해 지속적으로 갱신해야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결국 공간의 지속성을 모색하고자 콘텐츠 도입을 시도한 이들 중 대다수는, 역으로 콘텐츠 생산 방안을 강구해야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반면 콘텐츠를 바탕으로 공간을 구성하는 일은 조금 더 수월하다. 꾸준히 축적해왔거나 생산해내는 콘텐츠가 있고, 그 콘텐츠의 매력과 대중성까지 검증받았다면 두말할 나위 없다. 따라서 콘텐츠 부동산의 시대에는 이미 검증된 콘텐츠를 열심히 발굴하고, 이를 공간 콘텐츠로 적절히 재구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1993년부터 연희동을 지켜온 철물점을 재해석한 정음철물  
ⓒ 정음철물


(주)정음이 운영하는 정음철물은 건축재료 매거진 <감(GARM)>의 콘텐츠를 바탕으로 구성한 ‘콘텐츠 부동산’ 공간이며, 동시에 ‘동네 건축 컨시어지 서비스’를 표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컨시어지(concierge)는 호텔에서 투숙객의 다양한 요구를 들어주는 서비스를 의미하는데, 최근에는 고객의 요구에 맞춰 상담하고 처리해주는 서비스를 지칭하는 용어로 많이 쓰인다. 정음철물은 공간 및 인테리어 분야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를 위한 편집숍인 동시에, 집수리 컨시어지 서비스를 결합한 동네 커뮤니티 공간이다. 정음철물이 위치한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은 단독주택이 많은 동네의 특성상 철물점이나 집수리에 관한 수요가 큰 편이다. 이러한 지역 특성과 이용자 성향을 분석해 2019년 6월 ‘철물점의 재해석’이라는 콘셉트로 공간을 오픈했다. 정음철물은 일본의 ‘툴박스(toolbox)’라는 기업에서 영감을 얻었다. 2003년 온라인을 기반으로 창업한 ‘R부동산’의 사업팀에서 시작된 툴박스는 2019년 별도의 회사로 분사했다. R부동산은 마니아 성향의 부동산 편집숍 겸 중개소이며, 거주자 취향에 따라 공간을 편집하고 구상하는 주거 DIY 서비스를 제안해왔다. 그중에서도 툴박스는 주거 DIY에 필요한 도구와 재료를 공급하는 서비스다. 이들은 철물뿐만 아니라 공간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요소 일체를 판매한다. 예를 들어 A라는 공간 스타일을 디자인한 뒤 이를 구현할 수 있도록 바닥재, 벽, 하드웨어, 콘센트, 전선 등 모든 재료를 판매하는 것이다. 스위치 개수와 같은 세부 요소는 옵션으로 정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과거의 철물점과 다른 미래형 철물점의 비즈니스 모델이다. 일본 전국에 열여섯 곳의 지점을 거느린 R부동산은 분명 규모가 큰 사업체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툴박스가 더 높은 매출을 거두고 있다. 수요자 중심의 서비스를 기획해 운영한 결과다. 반면 국내 철물점 대부분은 여전히 과거의 운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좁은 매장에 1,000여 개의 제품을 들여놓고 판매하는 방식은 철저히 공급자의 편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렇게 많은 물품을 진열해뒀지만, 막상 무엇인가 필요해서 찾으면 의외로 없는 것이 많다. 못 하나만 해도 그 종류가 수백 가지에 이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아파트 중심의 주택 공급이 이뤄진 탓에 상대적으로 한국에서는 DIY 인테리어 시장이 발달하지 않았다. “지금 시대에 철물점 운영이 가능하겠느냐”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앞으로 공간에 관한 개인의 취향이 나날이 발전할 거라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취향이 반영된 공간 구성을 돕는 서비스 역시도 각광받게 될 것이다.



철물점, 지역을 바꾸다

정음철물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조사한 것은 공간이 속한 지역이었다. ‘연희동(延禧洞)’이란 지명은 연세대학교 서문 인근의 연희궁터에서 유래됐다. 1968년 연희로와 증가로의 개통을 계기로 이 지역은 1970년대 초부터 전용 주택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당시 평지에는 주로 고급주택이 들어섰고, 고지대에는 시민아파트가 세워졌으며, 성산로와 연희로 주변에는 상가가 형성됐다.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토지 종 상향’◼이 이뤄지지 않아 이 일대는 대부분 제1종 일반주거지역과 제1종 전용주거지역으로 남아 있다. 그 결과, 지역 내 건축물의 50% 이상이 넓은 마당을 갖춘 주택이거나 45년 이상 된 노후주택이다.


앞서 말했듯, 낡은 단독주택이 주를 이룬 이 지역에서는 당연하게도 목공이나 전기 수리 등 간단한 집수리에 대한 수요가 높다. 특히 노후주택에서는 안전 문제와 시설 보수 문제가 수시로 발생하며, 이와 같은 문제가 삶의 질을 떨어트리는 요인이 된다. 여러모로 꾸준한 관리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인근에서 영업하는 몇몇 철물점에서도 체계적인 집수리 담당 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집수리 기술을 갖춘 목수, 전기기술자, 설비기술자 등은 대체로 고령인 데다, 그 숫자도 점점 줄고 있다. ‘힘든 직업’이라는 인식 탓에 신규 인력의 유입 역시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있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 지역 내 건축·공간 관련 기술 노하우가 다음 세대로 전수되지 못하고, 공간의 노후화는 갈수록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는 단독주택 밀집 지역에 위치한 철물점이 집수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시대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서비스나 공간이든 도태되기 마련이다. 21세기의 철물점은 젊은 인재를 대상으로 일상에 필요한 DIY 기술을 선보이고 교육하는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또한 30~50년간 기술을 갈고닦은 베테랑 기술자들과 감각적이고 의욕 넘치는 젊은 기술자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진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한 ‘DIYer(DIY 능력을 갖춘 사람)’ 육성에 그치지 말고, 다양한 성별과 연령대의 기술자·교육생·지역민이 함께 모이는 ‘DIT(Do It Together)’ 프로그램을 기획해야 한다. 이러한 연대와 네트워크를 통해 상호 성장을 유도하고, 이 과정 자체가 일종의 교육적인 대안으로 정착한다면 기술 분야 일자리 창출의 기회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토지 종 상향
제1·2종 일반주거지역을 제2·3종으로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종(種)이 상향됨에 따라 건축물의 용적률, 건폐율, 층수 등을 상향시킬 수 있다.





위: 인테리어와 건축 공사에 대한 상담 및 시공이 이뤄지는 컨시어지 구역 
아래: 건자재 회사, 가구 회사의 양품을 선별해 소개하고 판매하는 편집숍 구역
ⓒ 정음철물


지역과 도시를 바꾸는 ‘플레이스 메이킹’

정음철물의 세부 공간은 지역성, 앞서 언급한 상황, 그리고 그에 대한 나름의 대안을 반영해 기획했다. 정음철물은 1~2층 도합 100㎡(30평) 내외의 작은 공간이지만, 다섯 개 구역으로 분리해 운영 중이다. 먼저 판매 구역에 해당하는 편집숍은 <감> 매거진을 만들면서 취재했던 건자재 회사, 가구 회사의 양품을 선별해 소개하고 판매하는 공간이다. 아직은 판매 대행 위주로 운영하고 있지만, 향후 툴박스처럼 자체 디자인한 상품도 판매할 예정이다. 매장 입구의 쇼윈도 구역에는 쇼룸을 마련해 월 단위로 특정 브랜드를 소개하며, 가구·조명·건자재 분야의 최신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를 선도하는 브랜드의 전시를 진행해왔다. 안쪽 스튜디오에서 는 주로 유튜브 채널 <철물TV>를 촬영한다. 영상을 통해 간단한 공구 사용 방법, 구매 노하우, 안전 수칙 등을 지역의 기술 장인과 함께 알려준다. 끝으로 컨시어지 구역에서는 간단한 집수리를 비롯해 인테리어와 건축 공사에 대한 상담 및 시공을 진행한다. 이처럼 정음철물 1층 공간은 상품 판매와 컨시어지 서비스 제공에 집중하는 동시에, 쇼룸 운영과 미디어 서비스를 통해 온·오프라인 홍보를 전개한다. B2C와 B2B 사업 모델을 적절하게 섞어 운영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사실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건자재 회사들이 B2C 사업을 할 기회가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양품의 브랜드가 소비자와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2층에서는 워크숍 공간인 정음제작소, 지자체나 기업을 상대로 공간 기획을 컨설팅하는 정음연구소를 운영 중이며, 공유오피스도 마련돼 있다. 전체적으로 다소 연관성이 부족해 보일 수 있는 공간이지만, 1층의 판매점과 긴밀하게 연관된 것이 특징이다.


지역을 바꿀 수 있는 ‘플레이스 메이킹’을 기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지역민의 다양한 교류를 유도하고, 경제적인 순환을 이뤄내며, 건강한 삶을 공유하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함께 만들고 배우며 성장하는 커뮤니티를 통해 기술 분야 전문가와 젊은 창작자는 만남의 기회를 얻는다. 이 과정에서 메이커 기술 교육을 넘어 지역의 역사·공간·자원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지속 가능하고 다양성을 갖춘 좋은 공간과 마을, 나아가 도시를 가능케 하는 ‘플랫폼’이다. 이와 같은 청사진을 바탕으로 정음철물은 앞으로도 판매점과 더불어 컨시어지·교육·컨설팅 서비스를 병행할 예정이다. 동네의 작은 철물점에서 벌이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지역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음을 우리는 증명해나갈 것이다.


※ 본 콘텐츠는 《아는도시 02: 도시생활혁명》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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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심영규

shim09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