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동네 아는강남》 미리보기 #2

지금, 강남 로컬리티

모종린|

강남은 서울의 경제 중심지다. 서울을 뉴욕이라고 가정한다면 강남은 서울의 맨해튼이다. 문화 영역으로 확장해 강남과 맨해튼을 비교해보자. 강남이 맨해튼과 같은 문화 중심지일까? 우리가 맨해튼을 선망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곳에 모인 산업 때문이 아니다. 맨해튼의 진짜 매력은 그 산업을 유인한 도시 문화다. 패션, 미술, 공연, 건축, 디자인 등 거의 모든 문화 분야에서 맨해튼은 세계 트렌드를 주도한다. 강남도 맨해튼과 같이 도시 산업과 문화의 결합으로 발전해야 한다. 개성과 정체성으로 경쟁하는 탈산업화 시대에 강남도 강남다운 도시 문화로 승부해야 한다.



2018년 오픈한 애플스토어 가로수길점은 신제품 출시 때마다 긴 대기줄이 늘어섰으나,
지난 2월 애플스토어 2호점이 여의도에 문을 열자 반드시 강남으로 갈 필요가 없어졌다


강남 정체성 발굴에서 중요한 콘셉트가 로컬이다. 로컬이 필요할 것 같지 않은 강남이야말로 로컬 마인드가 가장 절실한 곳이다. 로컬이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라면,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을 앞두고 촉발한 ‘로컬 논쟁’의 그 로컬로 이해하면 된다. 봉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할리우드 영화산업을 상징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로컬’ 시상식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흥미롭게도 할리우드는 자칫 폄하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 발언에 분노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영화산업의 유일한 중심지가 아닌 여러 중심지 중의 하나로 생각해야 한다는 봉 감독의 조언에 공감한 것이다. 할리우드의 과제는 봉 감독이 지적한 문화다양성의 수용에 그치지 않는다. 중심지라는 자부심 때문에 소홀할 수 있는 정체성의 강화도 포함한다. 로컬 관점에서 보면 할리우드가 생산하는 영화는 필연적으로 할리우드 방식의, 할리우드 스타일의 영화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미래에도 할리우드 경쟁력의 본질은 로컬, 즉 그 지역에 집적된 크리에이터와 기업이 만드는 문화다.


강남 로컬의 진화

현재 강남의 위치는 할리우드와 비슷하다. 1990년대 오렌지족과 함께 등장한 ‘강남스타일’은 오랫동안 한국의 패션, 뷰티, 외식, 디자인 스타일을 선도했지만(서우석, 2016), 지금은 강남이 정체성 강화로 새로운 도전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다. 강남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YG, JYP, 빅히트 등 강남에 집적했던 K팝 기획사들의 ‘탈강남’ 현상이다. 한때 패션과 뷰티산업의 중심지로 여겨지던 위상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의미다. 강남이 과연 로컬 기반의 독자적인 문화 없이 문화 중심지를 유지할 수 있을까? 강남은 1970년대 이후 로컬 문화를 다른 지역으로 수출한 문화 중심지로 기능했다. 강남의 일차적인 기여는 도시 모델이다. 한국 신도시 모델을 ‘교육과 공공 기관 이전을 매개로 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로 정의한다면, 그 원조는 강남이다. 1960년대 여의도 개발 역시 신도시 모델을 따른 것이지만, 이 모델이 만개한 곳은 1970년대 개발이 시작된 강남이다. 강남의 영향력을 대변하듯, 전국의 많은 도시가 ‘소강남’이라 회자되는 부유층 신도시, 로데오 거리와 가로수길로 불리는 거리를 자랑한다(한종수·강희용, 2016).

강남의 도시 문화 또한 로컬에서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의 도시 문화는 명동, 광화문, 종로가 대표하는 중심부, 그리고 신촌, 동숭동 등의 대학가에 집중됐다. 현재 서울 시민에게 익숙한 골목상권은 2000년대 이후 나타난 현상인데, 가로형 상업공간이 시작된 곳이 바로 1990년대 초 강남역과 압구정동이다(박희석·한진아, 2010). 이 가로문화가 1990년대 중반 홍대앞으로 확산되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골목상권 문화의 기반이 됐다.



한때 '핫플레이스'로 불렸으나 현재 침체기를 겪고 있는 신사동 가로수길 상권


20~30대가 여행 가듯 찾는 골목상권의 부상은 강남의 독주체제를 약화시켰다. 가로수길, 홍대, 이태원, 삼청동 등 1세대 골목상권 중 가로수길 만이 강남에 있고, 나머지는 강북에 있다. 그 후에도 도시 문화를 선도하는 골목상권은 강북 원도심 중심으로 확산돼, 필자의 집계에 따르면 현재 총 58개의 서울 골목상권 중 53개가 강북에, 5개가 강남에 위치한다. 골목상권 개수의 문제만이 아니다. 현재 가로수길-도산공원-압구정동-청담동으로 이어진 강남권 골목상권의 구성은 2010년대 초반 그대로다. 새로운 골목상권이 진입하지 않은 것이다. 압구정동, 청담동 등 기존 상권도 활력을 잃은 지 오래다.

2010년 이후 골목 문화를 질과 양적으로 선도하는 지역은 강북이다. 홍대에서 시작된 ‘힙 타운’ 문화는 이태원의 경리단길을 거쳐 지금은 성수동과 을지로로 확산됐다. 사람이 골목길에 모이자 언론에서도 ‘밀레니얼 세대는 왜 강북의 골목길에서 놀까’라고 질문하기 시작했다(음성원, 2018). 강북의 골목 문화는 이제 지역 도시에도 영향을 미친다. 많은 지역 도시들이 새롭게 활성화된 상업지역을 해당 지역의 경리단길을 의미하는 ‘~리단길’로 부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강북 '모방' 현상은 서울의 중심부를 명동이라고 부르던 1970년대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1980~2000년대 강남의 로데오 거리와 가로수길을 선망한 지역 도시들이 이제 강북의 경리단길에서 영감을 얻는 것이다.



강남 특유의 세련된 스타일을 접목한 분식집 콘셉트로 눈길을 사로잡은 도산분식


강남 로컬의 길

로컬을 강화하는 강남의 대응은 이미 시작됐다. 문화산업과 뷰티산업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강남의 문화 경제에 새로운 동력이 필요해진 것이다(서우석·변미리, 2017). 강남 골목에서 자란 청년들이 선릉 일대와 도산공원, 양재천 등에서 강북의 골목 문화를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강남에서 시작한 사업 경험을 기반으로 강북으로 진출한다는 공유오피스 기업 패스트파이브, 아우어 베이커리, 도산분식 등 강남 브랜드를 연속 출시하는 CNP 컴퍼니, 청담동에서 다운타우너, 노티드도넛 등 뉴욕풍의 외식 브랜드를 연이어 출시하는 GFFG, 잠실 기반 F&B 기업 일도씨 패밀리, 선릉역 낡은 주택을 리모델링한 복합문화공간 알트탭스페이스 등 강남 지역성을 표방하는 로컬 브랜드가 탄생했다.

외부 문화를 강남 방식으로 재해석해 사업화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최인아책방, 소전서림, 믿음문고 등 강남에 독립서점을 창업한 기업은 ‘개인 공간’, ‘클래식 연주회’, ‘힐링’ 등 강남스타일로 개조한 모델로 강남에 진입한다. 지속가능한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는 포틀랜드의 패션 브랜드 나우(nau)를 인수한 블랙야크는 도산공원에서 강남 골목길과 포틀랜드의 도시 문화를 접목한 플래그십 매장을 운영한다.

명품 문화를 기반으로 새로운 서비스와 상품을 개발하는 기업들 또한 로컬 기반의 강남 기업이다. 비엔나의 클래식 음악을 현지와 자체 스튜디오에서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풍월당, 명품 클래식 안경을 연구해 자체 안경 브랜드를 출시한 프레임몬타나, 해외 명품 백의 위탁 생산을 거쳐 자체 브랜드를 생산하고 도산공원에서 플래그십 스토어를 운영하는 시몬느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도시형 골목상가의 선례로 언급되는 신사동의 가로골목


지속가능한 강남 로컬리티

강남의 지속가능한 로컬 문화는 강남 주민의 일상에서 찾아야 한다. 청담동, 압구정동이 이미 동네 문화를 ‘산업화’했다면, 추가적으로 산업화할 수 있는 동네 문화에서 시작할 수 있다. 개인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다수의 전문가와 주민이 주목하는 동네는 대치동 은마종합상가, 양재천길, 대치동 학원가다. 오랜 기간 주민과 상인의 생활문화가 축적된 은마종합상가는 아파트 단지 내의 지속가능한 상가 문화를, 강남에서 보기 어려운 자연환경을 보유한 양재천길은 자연 친화적 도시 문화를, 강남을 대표하는 서비스산업을 보유한 대치동 학원가는 교육 콘텐츠를 활용한 공간 비즈니스를 제안할 수 있다.

강남에서 골목상권을 활성화하기 어려운 이유는 ‘가격’이다. 강남에선 싼 지역이라고 해도 청년 창업가에겐 여전히 임대료가 비싸다. 하나의 희망은 임대료 문제에 대한 강남 기업의 혁신이다. 부동산 스타트업들은 공유주택, 공유오피스 등 공유경제에서 돌파구를 찾고, 네오밸류와 같은 부동산 개발회사는 신사동에서 도시형 골목상가인 ‘가로골목’을 개발해 스몰 브랜드를 유치하는 식이다.

반면, 강남 전역에서 진행되는 재건축도 도시 문화 형성에 걸림돌이다. 개방적인 작은 마을 모델로 개발된 초기 강남 신도시 모델과 달리 최근 개발되는 대규모 주택지는 거의 예외 없이 외부와 차단된 폐쇄형 아파트 단지다. 외부인의 출입을 규제하는 단지는 그 자체로 도시 공동체 문화를 저해한다. 주민에게 반드시 이로운 것만도 아니다. 가장 큰 단점은 상가다. 외부인 없이 주민 대상으로 운영하는 단지 내 상가는 거리형 상가와 같은 활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머물고 싶은 강남 로컬 문화를 만들기 위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자동차 중심 단지의 확산은 강남 전체의 가로 문화를 약화시킨다. 자동차 이동이 보편화된 강남의 거리엔 보행자를 보기 어렵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작은 가게도 발렛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소규모 자본의 개성 있는 가게가 강남에 진입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다. 장기적으로 강남의 위기는 강남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강남이 이 기회를 살릴지 여부는 새로운 로컬의 개발에 달렸다. 다양한 도시 문화를 중시하는 탈산업화 사회에서 해외에서 수입한 명품 문화로는 부족하다. 외부 문화에 개방하고, 기존 문화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강남 로컬의 길이다.


※ 본 콘텐츠는 《아는동네 아는강남》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

에디터

* 편집자: 아는동네

모종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