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식당 간판 뒤에 숨은 이야기

화교거리

박혜설|

연희동과 연남동 거리를 걷다 보면 붉은색 풍등으로 꾸며놓은 중식당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중식당이 조금 많은 동네인가 보다 싶었는데, 같은 거리에 두 집 건너 한 집꼴로 중식당이 있는 걸 보면 단순히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실제로도 연희·연남은 서울에서 화교가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어 일명 ‘리틀 차이나타운’으로 불리는 동네다. 인천이나 부산처럼 항구도시도 아닌 서울 도심 한복판에 화교들이 모여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희·연남에 화교 거리가 생긴 역사부터 동네에서 내로라하는 중식당의 대표 메뉴까지. 화교 거리에 관한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쳐봤다. 




화교(華僑), 그들은 누구인가?

한국 화교의 기원을 추적하려면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82년,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청나라 군부대가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이때 군수물자를 조달하러 청나라 상인이 함께 유입됐다. 그들은 한국에 거주하는 동안 군사들을 보조하는 일 이외에도 서울, 인천, 부산 등을 중심으로 활발한 상업 활동을 펼친다. 전쟁이 끝난 후 청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은 상인들이 바로 한국 화교의 뿌리가 된다. 초기의 한국 화교는 그야말로 전성기를 누렸다. 이들은 악착같은 생활력으로 잡화점, 양장점, 이발소, 요식업 등 다양한 상업 활동을 지속하며 부를 축적했으며, 약 40년간 고국으로 보낸 돈만 무려 1,000만 엔에 달했다. 1946년에는 전체 무역 수입 총액의 82%를 화교가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니 새삼 화교의 경제력에 놀라게 된다.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사람들

그렇게 낯선 땅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는 듯하던 한국 화교는 안타깝게도 1948년, 한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기나긴 암흑기를 맞이한다. 외국인 입국 금지 정책으로 새로운 화교의 유입이 끊긴 것은 물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는 중국과의 교역도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화교를 배척하고 차별했다. 1961년 제정된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은 대를 이어 살던 화교의 집과 토지를 몰수했고, 1962년 제2차 화폐개혁은 현금 소유를 선호하던 그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마침내 1970년, 서울 소공동과 서대문 일대 재개발 사업으로 ‘차이나타운 강제 철거’ 사건이 벌어졌다. 당초 재개발하며 화교 회관을 지어주겠다는 허울뿐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 다른 나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차이나타운이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전략적 차별 정책에 의한 결과라 볼 수 있다.




떠밀려서 도착한 동네, 연희·연남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은 이들이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지금의 연희동과 연남동이다. 연희동은 1969년 명동에 있던 한성화교중·고등학교가 이전한 지역이라 화교 자녀를 교육하는 데 용이했고, 연남동의 경우 연희동과 가까우면서도 다른 지역에 비해 집값이 비교적 저렴했기에 새로운 보금자리로 적합했다. 화교들이 이 동네에 모인 지도 벌써 50년. 이제 연희·연남이 그들에겐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같은 지역에 머물거나 부모님의 대를 이어 동네에서 중식당을 운영하는 화교가 많아졌고 연희동과 연남동은 화교 네트워크의 중추 역할을 담당했다. 한성화교협회에 따르면 현재 연희·연남에 거주하는 화교는 약 3,000명으로 서울에서 가장 많다. 두 동네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 동네를 떠나지 않을 예정이라고. 친척과 동창생 등 같은 처지를 공유하는 사람이 모인 곳이니 일은 다른 지역에서 하더라도 주거지는 그대로 연희·연남에 두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화교가 만든 식(食)문화 한때

10만 명에 가깝던 한국 화교는 끊임없는 차별 정책을 버티지 못하고 대만, 미국, 호주 등으로 이주해 2만 명 아래까지 줄어든다. 한국 사회에 남은 화교는 가난해서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하고 남은 자들, 이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며 악으로 깡으로 버틴 이들이다. 화교는 이중국적 취득이 불가능해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됐고, 취업하더라도 승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화교들이 웍을 집어 들거나 만두를 빚으며 요리를 하게 된 건 선택이 아닌 숙명에 가

까웠다. 당시 화교 식당 메뉴판에는 흔히 중식당에서 볼 수 있는 짜장면, 짬뽕이 없었다. 본인과 같은 화교를 대상으로 식당을 운영했기 때문에 막창 튀김, 산라탕 등 본토 서민 음식이 주를 이뤘다. 이때의 소박한 분위기와 저렴한 가격의 중식당과 만둣집이 지금도 연남동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반면 연희동에는 비교적 고급 중화요리점이 하나둘 들어섰다. 화교들은 부촌이던 연희동에서 한국 주민을 대상으로 한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요리를 내놓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중국 여행객이나 단골손님만 찾던 연희·연남 화교 거리에 사람들이 몰려들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경의선숲길 공원 조성,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홍대 상권 이동으로 두 동네가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와도 겹친다. 어느새 연남동 하모니마트 사거리와 서대문구 연희맛로 부근은 중국 본토의 맛을 느끼고 싶은 이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물론 한창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던 스타 셰프의 식당이 연희동에 위치한 것도 한몫했다. 생계 유지를 위한 화교의 마지막 선택이 리틀 차이나타운의 부흥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참고 자료

이정희, <화교가 없는 나라>, 동아시아(2018) 정성호, <화교>, 살림출판사(2004)

정은주, <차이나타운 아닌 중국인 집거지>, 서울학연구(2013) <아는연남>, 어반플레이(2017)

“전 세계에서 화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나라는 한국뿐”, 머니투데이(2019.04.03)

에디터

* 편집자: 고현

박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