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동네 아는전주》 미리보기 #2

전주라이프, 도시의 감도가 느껴지는 공간들

최정순, 정수미|

 공간 가득 볕이 들어차고, 그 사이를 채운 공기는 따사롭고, 사람들의 적당한 소란이 어우러진, 서점이거나 작업실이거나 전시장인 공간들. 익숙한 듯싶지만 생경한 풍경 속에서 소리를 낮추고 가만히 지켜보게 하는 곳. 요즘 전주에서 감도를 높이는 그곳에서 발견한 이 도시의 라이프스타일.



그 동네에 산뜻하게 숨겨진 화실  '비화실' 


‘숨을 비(䨾)’를 쓰는 카페 겸 갤러리 ‘비화실’은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한적한 골목가에 자리한다. 시야를 가리는 고층 건물이 없는 주택가 틈새로 평범한 가정집처럼 다소곳이 들어앉아 있다. 공간을 알리는 입간판조차 튀는 것 없이 단정하고 말간 모양새다.  

“100%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정 부분 이상으로 처음 의도한 바가 구현된 곳이에요.” 조한신 대표가 유년 시절을 보낸 집의 1층을 카페로 개조하기로 결심했을 때 가족은 타지로 나갔던 자식과 살 수 있어 좋다면서 흔쾌히 찬성했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고, 고향 전주로 돌아온 후 사진 전시를 포함해 다양한 아트워크를 경험하는 문화 예술 공간과 그와 관련한 경험이 많지 않은 현실을 보며 직접 전시장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리고 약 7개월간 스스로 공사를 진행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이 가꾼 곳에 마음 맞는 손님이 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불어넣었다. 잘 가꾼 주택가와 신록 우거진 가로수 풍경이 다정한 동네에서 ‘숨겨진 화실’을 콘셉트를 떠올렸다.



첫 공간에 이은 비화실의 다음 행보는 전시 공간을 분리하는 것이다. 같은 동네가 될지 아닐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정해진 건 순수한 전시장이 되리라는 점이다. 사진을 전공한 그에게 또 다른 꿈은 아티스트를 지원하는 일이다. 사진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은 이유 중 몇 할은 경제적인 이유가 차지하는데, 같은 상황과 고민을 겪는 작가들을 위해 작품을 전시할 만한, 작품과 잘 어울리는 공간으로 열정과 동력을 힘껏 끌어올리고 싶다.



경계에서 피어나는 꾸준함과 충만함  '물결서사'


전주시 노송동 성매매 집결지 선미촌 재생에 관해 가장 상징적인 장소가 된 물결서사는 전주에서, 혹은 전주를 찾는 여행자 사이에서 ‘나만 알고 싶은 서점’으로 통한다. 이를테면 더는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싶은, 인디 밴드 같은 존재감이다.

물결서사는 지명인 ‘물왕멀’에서 연유한다. 임주아 대표는 물왕멀이 풍기는 물로 꽉 찬 느낌에 강하게 끌렸는데, 조사해보니 실제로 물이 좋은 동네라는 뜻을 담고 있어 더 큰 애정을 갖게 됐다. 예사롭지 않은 이름과 기운을 기치로 삼기로 정했지만, 막상 물왕멀을 상호에 넣으니 어쩐지 가독성이 떨어지는 듯했다. 들었을 때 누구나 좋아할 만한 단어를 찾아보기로 했다. 미친 듯이 책을 뒤졌고, 숱하게 생각하던 어느 날 ‘물결’이 번뜩였다. 다음에 붙인 ‘서사’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있는데, 서점이나 책 가게 외에 사실대로 기록한다는 뜻이다. 서점이나 책방으로 규정한다면 공간이 하나의 성격으로 귀결되겠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을 공간이길 희망했다. 



물결서사의 행사 중 하나는 최장수 프로그램이자 한 달에 한 번 개최하는 시 쓰는 모임 ‘100행시’다. 이 모임은 카센터를 하는 동네 사람이 임주아 대표가 시인으로 활동하는 것을 알고 찾아와 시를 쓰자고 제안한 데서 비롯됐다. 100줄, 100행을 이어 쓰는데, 글을 쓰다 보면 자꾸 생각하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기에 100줄이 되어도 좋으니 막 써보자는 취지로 모임을 꾸렸다. 역시 꾸준함을 위해서다. “물결서사가 문을 열었을 당시 주변 업소 스물네 곳이 장사를 했어요. 붉은 등을 다 켜고서. 그 와중에 우리가 시 쓰는 모임을 한 거예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뭐 하는 곳이냐면서 들이닥쳐서 구경했죠. 선미촌은 뭘 해도 되는 무법 지대였어요. 뭘 해도 별일 없는 곳이었던 거죠. 모임이 있는 저녁에 이곳에 앉아 어떤 기운을 뿌리내리고 있었던 거예요.”

애초에 성매매업소였던 지난 시간을 송두리째 긁어내고 지우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흘러간 역사와 탈바꿈한 현재 속에 공존하고 싶었다. 상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자 했다. 앞으로 사람들이 물결서사를 찾았을 때 보고 느끼는 것을 가져가기를 바란다. 제2의 물결서사처럼 선미촌을 정비한 자리에 정주할 공간이 들어서야 하는 이유다.



동네에서 문화 공간 한 뼘씩 잇기  '기린토월' 


‘마당재길’ 이전 명칭은 ‘남노송동’이다. 남노송동은 30년 이상 된 노후 주택 밀집 지역으로 약 70%의 노후 건물과 17%에 달하는 공·폐가가 있으며, 마을 주민의 45%는 65세 이상이다. 침체된 동네 분위기에 변화를 꾀하고자 도시 재생이 이루어졌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에서 실시한 ‘2020 취약 지역 생활 여건 개조 사업’에 선정된 덕분이다. 여기에 전주의 문화 플랫폼 ‘문화통신사협동조합(이하 문화통신사)’이 들어왔다. 40년 된 목욕탕에 둥지를 틀고 ‘기린토월’이라 이름했다. 이들은 기린토월을 기점으로 모종 심듯 빈 공간을 빌려 ‘한 뼘 갤러리’, ‘두 뼘 작업실’, ‘세 뼘 도서관’, ‘네 뼘 게스트 하우스’ 등으로 거리를 잇는 중이다. 

4층 건물로 이루어진 기린토월은 층마다 쓰임새가 다르다. 1층은 옛 목욕탕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카페다. 온·열탕은 좌석으로, 사우나실은 프라이빗 룸으로 변모했다. 2~3층은 문화통신사의 사무실인데, 파이를 나누듯 자투리 공간을 활용해 전시장으로 쓴다. 2층에는 소규모 기획 전시실, 3층에는 ‘한 뼘 미술관’과 작은 도서관이 있다. 물탱크 보관실이었던 한 뼘 미술관은 오직 한 사람만 관람할 수 있는 전시 공간이며 작품과 음악은 매일 교체된다. 태블릿 PC에 담은 작품을 스크린에 비추고, 작품에 어울리는 음악을 튼다. 옥상에서는 부정기적으로 연주회와 ‘마을 상담소’가 열린다. 마을 상담소는 문화통신사에서 마을 어린이를 위해 준비한 특별 이벤트다. 직원들이 토끼로 분장하고 고민을 들어준다.



전시장 곳곳에는 인근 초등학생들의 작품, 마을 어르신이 왼손으로 그린 그림, 대학생들의 졸업 작품 등이 배치되어 있다. 작업 공간이 필요한 청년 예술인을 위해 작업 공간을 내어주며, 마을 여행자를 위한 숙소도 제공한다. 마을 주민은 문화통신사가 개발한 ‘품앗이 통장’으로 공간을 사용하거나 체험할 수 있다. 주민이 재능을 기부하면 마일리지를 획득하는데, 재능 맞교환이나 생필품 구매, 공간 사용료 등으로 환원된다. 문화통신사는 마당재길을 넘어 전북 전체로 품앗이 통장을 확장하는 게 목표다.



※ 본 콘텐츠는 《아는동네 아는전주》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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