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이 애플과 손잡고 만든 20분 분량의 영화 <일장춘몽>이 유튜브에 공개됐을 때 ‘아이폰으로 담은 힙한 한국’이라는 평이 따랐다. 힙한 우리나라 문화를 담아낸 영화에는 지우산과 부채가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손에는 줄곧 부채와 지우산이 들려있고, 심지어 이를 무기로 싸우는 장면도 있다. 이는 각각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45호 우산장 윤규상과 윤성호 이수자,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박계호의 작업물이다.
윤규상의 지우산
우산장 윤규상은 대나무를 쪼개 살을 만들고 그 위에 종이를 얹어 종이우산, 지우산을 만든다. 60여 년간 일을 해왔는데, 이제는 아들이 그의 길을 따라 이수자가 됐다. 그가 우산 만드는 일을 처음 익힌 곳은 전주역 뒤편 장재마을이다. 오래전부터 전주에서는 한지가 났고, 지근거리의 담양에서는 우산살의 주재료인 대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윤규상 우산장에 따르면, 한 집에서 대나무를 깎아 살을 만들면, 어느 집에서는 종이에 기름을 먹여 살에 붙이고, 또 다른 집에서는 꼭지를 끼우는 식으로 공정을 분화해 마을 전체가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지우산을 생산했다. 이후 비닐이 보급화되면서 비닐우산을 함께 만들었고, 천 소재 우산이 보급된 후로는 수공으로 지우산을 만드는 풍경은 자취를 감추게 됐다.
지우산을 비롯해 우산에 별표를 찍어 전국 각지로 납품하던 비닐우산까지, 열심히 우산을 만들고 팔았다. 그러는 틈에 우산을 만드는 발상지는 과연 어딜까, 호기심이 일었던 윤규상 우산장은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를 통해 조선시대 왕가가 지정했던 당대의 우산장 목록을 확인했다. 지우산 만드는 일에 대한 자긍심은 책임감, 사명감이 됐다. 지우산이 천 우산에 밀려나자 생계를 위해 뜨개바늘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우연히 TV에 나온 국가 정상 모임에서 하얀 지우산을 펼쳐 들고 기념 촬영을 하는 것을 본 후, 지우산이 저렇게 아름다웠지, 하고 묻어둔 마음을 꺼냈다. 그리고 다시 대나무를 손에 쥐었다.
10여 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따라 지우산을 만든 지 이제 8년 차를 맞은 윤성호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더러 보이는 중국산 소품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더욱 지우산을 오래 만들고,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소개하고 싶다. 지우산을 주제로 한 체험 프로그램용 DIY 키트를 제작했고, 집 안에 걸어두는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확장하고 있다. 윤성호가 뒤를 잇기까지 윤규상 우산장은 아들의 선택을 만류했지만, 이제는 제 방식으로 일을 해나가는 후배이자 동료가 함께하니 대견하고 든든하다. “젊은 친구니까 일하는 것이 달라요. 잘합니다. 저는 판매나 홍보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주문이 들어오거나 하면 만드는 데 주력할 수 있어요. 지우산을 잊히지 않게 할 방법에 대해선 아들이 나보다 훨씬 고민하니까요.”
박계호의 부채
박계호 선자장은 전라북도무형문화재 명예 보유자인 박인권 선자상의 아들이다. 유년 시절부터 아버지 곁에서 어깨너머로 부채 만드는 것을 보고 배운 그는 올해로 34년째 부채를 만들고 있다. 집안일이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숨 쉬듯 자연스러운 삶이 일부가 부채였다. 특히 조선시대부터 의생활 중 한 부분을 차지했던 ‘합죽선’은 부챗살에 종이를 붙여 접거나 펼칠 수 있게 만든 부채로, 박계호 선자장의 주특기다. 명상으로 아침을 여는 그는 100가지가 넘는 부채 만드는 공정에 임하기 전 마음을 다스린다. 나무를 깎아 부챗살을 만들고 풀을 발라 종이를 붙이고 말려 부채를 만들기까지 보통 석 달이 걸린다. 부채를 만들다 보면 어느새 한두 계절이 훌쩍 지나 있기 예사다. 그는 여름에 만든 부채, 겨울에 만든 부채로 지난 시간을 헤아린다.
전주부채연구소를 운영하며,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합죽선을 협찬했다. 드라마 <녹두전>, <밤을 걷는 선비>, <비밀의 문>, <신의>, 영화 <사도>, <박열>, <봉이김선달>, <조선명탐정2>, <관상>, <협녀, 칼의 기억>,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 <도리화가> 등은 물론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까지, 박계호 선자장을 거친 다양한 합죽선이 영화와 드라마 장면에 등장했다. 참고로 그가 처음 소품으로 영화에 참여한 작품은 <혈의 누>다. 전통에 기반해 합죽선을 만드는 데 이어 부채의 종이에 그림이나 글을 얹은 특별한 부채 역시 그가 주력하는 분야다.
조선시대, 전주에는 전라도 관찰사(감사)가 주둔하던 전라감영이 있었고, 전라감영에는 부채를 제작하는 선자청이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임금에게 진상할 부채를 만들었고, 전통을 지켜 합죽선을 만들었다. 그 명맥을 이어받은 박계호 선자장은 2020년 복원한 전주 전라감영 안에 선자청이 복원되기를 꿈꾸고 있다. 또 부채박물관, 부채미술관이, 다른 곳이 아닌 전주에 건립되기를 그린다. 그날을 기다리며 사람들이 원하는 특별한 부채를 만들고, 자리를 마다하지 않으며 합죽선에 관한 전시를 연다. 상어, 가오리 등 어류의 껍질로 만든 ‘어피선’, 선면을 옻칠한 ‘옻칠선’, 황칠해 만든 ‘황칠선’, 거북이 등껍질로 만든 ‘대모선’, 여러 색으로 그림을 그린 ‘채화선’ 등 전통 공정을 기본으로, 자신이 지닌 기술과 감각을 발휘해 부채의 선면과 변죽에 변화를 시도하기를 쉬지 않는다.
※ 본 콘텐츠는 《아는동네 아는전주》의 수록 콘텐츠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