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동네 아는경기> 네 번째 골목. 안산 원곡동 다문화 음식거리
모든 여행의 시작과 끝은 골목으로 통합니다. 어느 낯선 골목에서 누군가는 잠자던 호기심을 일깨우는 보석 같은 장소를 발견하고, 누군가는 소란스러운 일상에서 잠시 로그아웃한 채 한갓진 골목을 걸으며 여유를 즐기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오래된 골목에 켜켜이 쌓인 시간을 더듬어가며 흥미로운 이야기 속을 탐험합니다. 경기도는 지역 고유의 이야기를 발굴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골목길이 될 수 있도록 관광테마골목 육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는동네가 소개할 경기도 골목 15곳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껏 몰랐던 경기도 구석구석의 매력을 경험하는 골목 여행자가 되어보세요. <아는동네 아는경기>는 10번에 걸쳐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여러분을 찾아옵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안산에서 만난 4가지 맛
어떤 음식에 대한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만큼 강렬하게 각인된다. 그리고 때때로 음식의 맛과 향을 매개로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물리적 거리를 초월하기도 한다. 음식을 통해 추억 속 어느 순간이 재현되는 것을 경험하거나 미처 가보지도 못한 낯선 곳을 잠시 헤아려보는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음식점 사이에서 현지의 맛과 향을 고스란히 담아낸 가게가 최고로 손꼽히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일 것이다. 원한다면 전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고, 손쉽게 각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시대. 하지만 그저 골목과 골목을 오가는 것만으로 다양한 나라의 삶을 생생하게 엿보고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떨까? 바로 안산 다문화 음식거리의 이야기다. 저마다의 국적을 지닌 이들이 한데 모여 사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가장 친숙한 음식을,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함께 나누며 살아간다. 그 골목 안에서 만난 음식들은 누군가에게는 그리움을 달래주는 고향의 맛이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이끄는 초대장이다.
1. 베트남의 맛
디유히엔콴(경기 안산시 단원구 다문화1길 6)
많은 사람으로부터 절대적 지지와 사랑을 받는 쌀국수는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해외 음식 중 하나다. 그건 곧 ‘이제는 너무 익숙해 웬만해선 감흥을 느끼기 힘든 음식’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다수의 가게가 보편적인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기 때문에 찐 현지 맛을 구현한 쌀국수를 맛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러니 ‘디유히엔콴’의 방문을 앞두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레벨의 쌀국수를 맛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베트남 출신의 손님들로부터 “현지의 맛을 가장 잘 구현한 곳”이라고 인정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게에 들어서면 종일 우려내는 고기 육수 냄새와 향신료가 뒤섞인 향이 코끝에 먼저 닿는다. 두툼한 메뉴판 곳곳에 국내에서 흔히 접하기 어려운 식재료들이 적혀 있는 모양새를 통해 베트남의 식문화를 어렴풋이 가늠해보기도 한다. 소고기 쌀국수인 ‘퍼보다이(pho bo tai)’의 첫인상은 국물 맛이 예상보다 맑다는 것이다. 강한 조미료 맛으로 첫입부터 자극적인 여타 쌀국수와는 달리 먹으면 먹을수록 느껴지는 국물의 그윽한 깊은 맛이 만족스럽다. 여기에 접시 한가득 제공되는 고수 등의 향채와 숙주를 넣으면 맛과 향이 한결 풍성해진다. 취향에 따라 테이블마다 구비된 소스를 넣어 먹어도 좋다. 구운 돼지고기와 쌀국수를 새콤달콤한 소스와 함께 비벼 먹는 ‘분짜느엉(Bun Cha Nuong)’은 애초에 맛있을 수밖에 없는 조합이지만, 제대로 된 피시소스의 꼬릿한 감칠맛이 현지의 맛을 완성한다.
2005년 베트남 출신의 첫 번째 대표가 디유히엔콴의 문을 연 뒤로 몇 차례 가게 주인이 바뀌었고, 현재는 네 번째 대표인 임형섭 대표가 2014년 봄부터 이곳을 인수해 9년 가까이 운영 중이다. “베트남 현지 스타일을 고수하자”는 하나의 명확한 운영 방침 아래, 베트남 출신의 주방장을 두고 음식에 필요한 식재료 대부분을 베트남 현지에서 공수해 온다. 식사할 겸 방문해 가게 한편에 구비해둔 현지 식재료와 간식을 사 가는 손님도 많단다. 게다가 이곳에는 빼먹으면 아쉬운 특별한 메뉴가 있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베트남식 디저트인 ‘체(Che)’다. 쉽게 말해 베트남 사람들이 여름철이면 즐겨 먹는 빙수로, 얼음 간 것에 팥, 과일, 젤리, 코코넛칩 등의 달달한 재료를 듬뿍 넣어 만든다. 일반 베트남 음식점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메뉴인 만큼 식사 후 디저트로 맛보기를 추천한다. 숟가락 한입에 익숙한 듯 낯선 달콤함이 입안 가득 시원하게 퍼진다.
2. 중국의 맛
복성원 원곡1호점(경기 안산시 단원구 다문화길 13)
다문화 음식거리 초입에는 ‘다문화공원’이라는 이름의 작은 광장이 있다. 주민들은 그곳에서 편을 나눠 족구를 즐기기도 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응원과 환호를 보내기도 하며,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하는 모습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오가는 광장 맞은편에 ‘복성원 원곡1호점’이 있다.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여는 이곳은 여러 종류의 중국식 먹거리를 파는데, 점원의 설명에 의하면 “번듯한 음식점이라기보다는 한국의 분식집에 가까운” 가게다. 한국인들이 간단한 끼니 대용으로 집 근처 분식집에서 김밥, 떡볶이, 오뎅 등을 사 먹듯, 중국인들은 이곳에서 중국식 볶음면이나 전병, 만두, 꽈배기 등 간단한 먹거리류를 사 먹는다.
아침 일찍 방문하면 한약처럼 검은 물에 계란을 껍질 채 커다란 들통 가득 삶아 놓은 신기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간장 물에 찻잎과 각종 향신료를 넣고 계란을 껍질째 삶고 졸여 만드는 ‘차예단(茶葉蛋)’이다. 삶은 계란 껍질 표면에 일부러 균열을 내어 그 사이로 찻물이 배어들게 해 그물 같은 모양을 내는 게 특징이다. 예로부터 차에 곁들여 먹는 경우가 많아 ‘티 에그(Tea Egg)’라고도 불리며, 국내 차 애호가 사이에서도 종종 ‘차딴’이라고 부르며 찾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차예단은 중국의 길거리, 편의점, 등산로, 휴게소 등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오랜 대표 간식이다. 한국인에게 맥반석 계란이 있다면, 중국인에게는 차예단이 있는 셈. 간장 물에 졸인 것이다 보니 가장 먼저 짭조름한 맛이 느껴지는데, 계란 특유의 비린 맛을 살짝 잡아주는 은은한 찻잎과 향신료의 향 덕분에 고소한 맛이 부각된다.
복성원 원곡1호점처럼 기름에 튀겨낸 중국식 먹거리를 파는 가게에 방문하면 ‘또우장(豆漿)’과 ‘요우티아오(油条)’도 맛볼 수 있다. 또우장은 따끈하게 데워 마시는 달큰한 맛의 콩물이다. 한국식 콩국이 진하고 걸쭉한 편인 것과 달리, 중국의 또우장은 콩비지를 체에 걸러내는 과정을 거치는 덕분에 맑고 묽은 음료 상태에 가깝다. 주로 여기에 기다란 모양의 밀가루 반죽을 폭신하게 튀겨낸 요우티아오를 푹 적셔 먹는다. 맛보면 담백한 듯 고소하고, 바삭하면서도 촉촉하다. 이 두 가지 음식은 함께 먹을 때 그 맛이 더욱 조화를 이루는 영혼의 단짝 같은 존재다. 그러니 가게 바깥에서 기름에 튀겨낸 요우티아오를 발견했다면 또우장을 파는 가게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다문화 음식거리 내 대부분의 가게는 또우장 한 그릇을 1,000원, 요우티아오 두 개를 1,000원에 판매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보기 드문, 단돈 2,000원에 맛볼 수 있는 행복이다.
3. 인도네시아의 맛
카르티니(경기 안산시 단원구 다문화1길 1 2층)
인도네시아 전문점을 표방하는 국내 음식점 대다수는 인도네시아의 대표 휴양지, 발리의 분위기와 닮아 있다. 최근에는 ‘CNN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1위’이자 커리 소스와 코코넛 밀크를 넣어 졸인 인도네시아식 소고기찜 '른당(Rendang)'을 선보이는 가게가 꽤 생겨났지만, 대부분 관광지에서 흔히 먹어볼 법한 나시고렝(Nasi Goreng)이나 미고렝(Mi Goreng)처럼 친숙한 음식 위주로 메뉴가 구성되어 있기 마련이다. 만약 이보다 훨씬 다채로운 인도네시아의 음식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카르티니’에 가보자. 맛있는 한국 음식이 비단 ‘비빔밥(Bibimbap)’뿐만이 아니듯, 이곳에 가보면 그동안 자신이 인도네시아 식문화에 대해 얼마나 얄팍한 인식을 지닌 채 살아왔는지를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다문화 음식거리에서 인도네시아 식당을 찾고 싶다면 간판에 ‘와룽(Warung)’이 쓰여 있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와룽’이라는 단어가 ‘식당’이라는 뜻의 인도네시아어이기 때문이다. 카르티니 역시 간판에 ‘와룽 인도네시아’라고 적혀 있다. 카르티니를 포함해 이 인근에서 운영 중인 인도네시아 음식 전문점들은 한국에 거주하며 일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주 손님이다. 그렇다 보니 소수의 한국 손님보다는 끼니 해결을 위해 매일 같이 방문하는 인도네시아인 손님의 편의에 맞춰져 있다. 메뉴가 나열된 주문표에는 한국어 설명이나 어떤 음식인지 가늠할 수 있는 음식 사진조차 없다. 방문에 앞서 공부하듯 찾아본 몇 가지 대표 메뉴와 기초적인 단어들을 조합해가며 주문표를 공부하듯 열심히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고민 끝에 시킨 메뉴는 ‘소토 아얌(Soto Ayam)’. '소토'는 ‘국물’이고, '아얌'은 ‘닭’이란 뜻인데, 간단히 말해 닭 육수에 강황 가루를 비롯한 각종 향신료를 넣고 끓인 인도네시아식 닭고기 스프다. 혹자는 한국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네시아식 삼계탕'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음식은 인도네시아에 살아본 이들에게는 '고향의 맛'으로 여겨지는 대표적인 국물 요리다. 여기에 밥을 곁들여 국밥처럼 먹거나 면을 넣어 라면처럼 먹기도 한다. 주문한 소토 아얌 한 그릇과 함께 따라 나온 접시 위에는 밥, 매콤한 맛의 삼발 소스 그리고 새우 칩이 담겨 있다. 인도네시아 식문화의 독특한 점은 이처럼 밥과 함께 ‘끄루뿍 우당(Kerupuk Udang)’이라는 새우 칩이 나온다는 점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이를 식사에 곁들여 먹거나 식사 후 입가심으로 먹는다. 뜨끈한 소토 아얌의 국물 맛을 보면 진한 닭곰탕 같으면서도 여러 가지 향신료가 들어간 덕분인지 맛과 향 모두 꽤 이국적이다. 그렇게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는 동안 문득 인도네시아 어느 골목의 식당에 와 있는 듯한 즐거운 착각에 빠진다. 낯선 음식에 기꺼이 도전하고, 새로운 경험의 즐거움을 만끽하던 그때 그 여행의 순간처럼.
4. 우즈베키스탄의 맛
후르셰다사마르칸트(경기 안산시 단원구 다문화2길 3)
우즈베키스탄 음식 전문점인 ‘후르셰다사마르칸트(이하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 출신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 중 하나다. 물론 한국인의 입맛에도 이곳의 음식은 잘 맞는 편이다. 실제로 매스컴에 맛집으로 여러 번 소개된 이곳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많은 국내 여행객들이 찾아오곤 한다. 이곳의 상호는 유구한 역사를 지녔으며 ‘황금 도시’라고도 불리는 우즈베키스탄의 최고(最古) 도시 ‘사마르칸트’의 이름을 따온 것인데, 국내에서 영업 중인 우즈베키스탄 음식점 중 엇비슷한 상호가 많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가게에 들어서면 상호에 걸맞게 꽤 화려한 모양새가 눈에 들어온다. 황금빛 벽지가 사방을 두르고 있고, 벽면 양쪽에는 우즈베키스탄의 화려한 전통 문양과 사마르칸트의 모습이 그려진 도자기 그릇으로 장식된 모습은, 이 음식점의 정체성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중앙아시아 최대 도시이자 교통·문화의 중심지인 우즈베키스탄은, 과거 동서양을 이어주며 다양한 문화가 오갔던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현재 120여 개 소수 민족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다민족국가인 만큼,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우즈베키스탄의 음식들은 다양한 문화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즈베키스탄의 전통 음식 중에는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등지에서 두루 즐기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의 된장국만큼이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흔히 즐기는 가정식인 ‘보르쉬(Borsch)’가 대표적이다. 보르쉬는 비트, 토마토, 양배추, 감자 등의 채소와 소고기를 넣고 푹 삶아낸 수프를 말한다.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비롯해 동유럽에서도 즐겨 먹는 음식이다. 보르쉬를 주문하자 점원이 “보르쉬와 함께 먹는 빵이 있는데, 곁들이겠느냐”고 묻는다. 이처럼 우즈베키스탄의 식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빵이다. 우즈베키스탄어로는 ‘논(Non)’이고 러시아어로는 ‘리뽀시카(Lepeshka)’라고 부르는 전통 빵은 크고 둥글납작하게 생겼는데, 담백한 맛의 이 빵을 우즈베크 문화권에서는 각종 음식에 곁들여 먹는다. 사마르칸트에서도 매대 앞쪽에 화덕에서 직접 구워낸 다양한 빵을 한데 진열해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대표 음식으로는 꼬치구이인 ‘샤슬릭(Shashlik)’이 있다. 양고기, 소고기, 닭고기 등을 기다란 쇠꼬챙이에 꽂아 구워내는 요리다. 이때 선택지에 돼지고기가 없는 이유는 우즈베키스탄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 문화권에 해당하기 때문. 중국식 양꼬치보다 훨씬 크고 두툼하게 잘라 겉바속촉으로 구운 양고기는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육즙이 흐른다. 취향에 따라 기름지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얇게 썰어 곁들여 나온 생양파가 적절히 보완해준다. 가게를 나서다 되돌아본 간판에는 커다랗게 쓰인 ‘사마르칸트’라는 글씨 아래 ‘후르셰다사마르칸트’라는 기업명이 함께 적혀 있다. '후르셰다(Хуршеда)'라는 단어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타지크어로 '행복하다'라는 의미다. 그 의미가 ‘행복을 주는 사마르칸트’이든 ‘행복한 사마르칸트’이든, 다만 그 이름 속에 손님들이 이곳의 음식을 통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다정한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을까.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런 생각을 한다.
사진. 황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