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동네 아는경기> 다섯 번째 골목. 고양 밤리단 보넷길
모든 여행의 시작과 끝은 골목으로 통합니다. 어느 낯선 골목에서 누군가는 잠자던 호기심을 일깨우는 보석 같은 장소를 발견하고, 누군가는 소란스러운 일상에서 잠시 로그아웃한 채 한갓진 골목을 걸으며 여유를 즐기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오래된 골목에 켜켜이 쌓인 시간을 더듬어가며 흥미로운 이야기 속을 탐험합니다. 경기도는 지역 고유의 이야기를 발굴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골목길이 될 수 있도록 관광테마골목 육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는동네가 소개할 경기도 골목 15곳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껏 몰랐던 경기도 구석구석의 매력을 경험하는 골목 여행자가 되어보세요. <아는동네 아는경기>는 10번에 걸쳐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여러분을 찾아옵니다.
밤리단 보넷길에서 보낸 조금 특별한 하루
가을이 괜스레 더 반가운 순간이 있다. 선선해진 날씨에 가장 좋아하는 외투를 꺼내입을 때, 갓 내린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온기가 손안에서 기분 좋게 느껴질 때,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가는 가로수 풍경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핸드폰 카메라로 눈앞의 순간을 담을 때. 이 풍요로운 계절은 일상 속의 여유로운 순간과 마치 한 몸처럼 잘 어울린다. 특히 유달리 볕 좋은 가을날이면 오늘 하루를 조금은 더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지는 법. 이럴 때는 고양 밤리단 보넷길을 유유자적 거닐어보자. 예로부터 밤나무가 많고 밤나무 가시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 ‘율동(栗洞)’이라고 불렸다던 동네는, 신도시 개발을 거치며 이제 다양한 취향과 저마다의 색깔을 지닌 공간을 골목 곳곳에 품은 동네로 변모했다. 가을볕에 단단하게 여물어가는 알밤처럼, 이곳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오늘 하루는 조금 더 특별한 기분으로 한가득 채워진다.
에스프레소 한 잔에 담긴 여유
올댓커피 보넷길 에스프레소 바(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일산로372번길 8 1층)
밤리단 보넷길의 모습을 본 누군가는 영국의 동화처럼 아름다운 동네 노팅힐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 거리는 2010년대 초반, 엔틱 소품샵, 공방들이 조용히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자발적으로 엔틱 플리마켓이 열리는 등 빈티지한 분위기의 앤틱 가구 거리로 먼저 입소문이 났다. 그러다 ‘보넷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골목 주변에, 젊은 층이 좋아할 법한 감각적인 분위기의 카페와 이색적인 음식점 등이 하나둘 들어서면서부터 이 거리 일대를 밤가시마을의 이름의 첫 글자를 따 ‘밤리단길’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아졌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골목을 따라 작은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지내게 되니 동네는 엔틱한 분위기와 트렌디한 감각이 공생하는 새로운 매력을 지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넷길과 밤리단길을 합쳐 오늘날 밤리단 보넷길이라 부르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던 셈이다.
밤가시공원 인근 길모퉁이에 자리한 ‘올댓커피 보넷길 에스프레소 바’는 이탈리아 정통 에스프레소를 즐길 수 있는 카페다. 카페 입구 스탠딩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앙증맞은 에스프레소 잔과 강렬한 색감으로 멀리서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빨간색 차양 그리고 광합성 하기 좋은 테라스까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치 유럽의 어느 카페에 와있는 듯하다. 올댓커피는 이탈리아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 지역의 다양한 에스프레소 문화를 재해석한 에스프레소 바를 컨셉으로 여러 지점을 운영 중인 커피 브랜드다. 일산 내에만 4곳의 지점이 있는데, 최근에는 서울 지역에도 진출해 여의도 현대백화점에 입점하고, 핫플의 성지인 성수동에도 신규 지점을 오픈하는 등 그 인기가 뜨겁다.
밤리단 보넷길 내에는 밤가시공원을 사이에 두고 먼저 문을 연 ‘올댓커피 보넷길점’도 있지만, 에스프레소 문화를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이탈리아 현지에서처럼 커피 한 잔을 가볍게 서서 먹고 갈 수 있는 에스프레소 바를 방문하는 편이 좋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에스프레소 위에 부드러운 크림과 달콤한 카카오 파우더를 올린 ‘카페 제제’로, 같이 나오는 바게트 한 조각을 크림에 찍어 먹으면 에스프레소의 쌉싸름한 맛과 크림의 달콤한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카페 스윗 로마노’는 설탕과 함께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반쯤 마셨을 때 레몬을 퐁당 빠뜨려 또 다른 맛을 즐기는 메뉴다. 진하고 고소한 에스프레소의 참맛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래쪽에 깔려 있는 브라운슈가를 저어 함께 마시면 쓴맛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한 잔을 즐겁게 음미할 수 있다. 카페에 잔잔히 흐르는 재즈와 깊고 진한 맛의 에스프레소 한 잔. 이 두 가지의 만남은 평범한 일상의 순간조차 아름다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만들어준다.
문 너머에서 만나는 비일상
하디르 커피(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무궁화로187번길 8-16 1층)
밤가시마을 일대의 첫인상은 간단히 말해 ‘차분하고 단정하다’. 반듯하게 구획된 도로, 그 길을 따라 단정하게 길게 뻗은 가로수, 5층 이하의 저층 아파트 및 주택 단지 등은 이 동네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이처럼 평온하고 일상적인 풍경 가운데서 유달리 독특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공간이 있다. 튀르키예의 맛과 분위기를 선보이는 ‘하디르 커피’는 중동풍 문양의 아치형 입구부터가 지나가는 행인의 눈길을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내부 공간에 들어서면 현지에서 들을 법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곳곳에 놓인 가구와 소품 하나하나까지 일관된 컨셉을 보여주고 있어 이곳을 방문하는 것 자체로도 잠시나마 튀르키예를 경험하는 듯하다. 매대 옆 공간 한편에서는 천연 당나귀유 비누, 올리브 오일, 허브티 등 현지에서 직수입한 물건도 판매 중이다.
분위기뿐만 아니라 현지의 맛을 구현하는 데에도 충실하다. 유명 예능 프로그램에서 ‘천상의 맛’이라고 소개되며 인기를 얻은 터키식 디저트 ‘카이막’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카이막은 우유의 지방을 모은 뒤 굳혀 크림처럼 만든 음식으로, 이곳에서는 직접 만든 치아바타 빵과 꿀을 곁들여 낸다. 다만 한정 수량으로 준비되는 메뉴이기 때문에 반드시 맛보고 싶다면 오픈 시간에 맞춰 아침 일찍 방문하는 편이 좋다.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통창으로 이국의 사막 풍경을 미니어처로 담아 놓은 듯 키 작은 선인장이 띄엄띄엄 놓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로는 동네 주민들의 일상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간다.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도, 일상의 공간에서 비일상의 공간으로 훌쩍 떠나온 듯한 기분이 든다.
나를 위한 한 접시의 기쁨
누크 브라세리(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산두로 144 1층)
밤리단 보넷길에서 특별한 브런치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 사이에서 ‘누크 브라세리’는 늘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장소다. 이곳은 올데이 브런치를 즐길 수 있는 카페 겸 와인 바인 동시에 다양한 종류의 내추럴 와인을 판매하는 보틀 숍이기도 하다. 같은 골목 내에서 ‘라자냐 맛집’으로 사랑받아온 이탈리안 레스토랑 ‘플라토141’가 올해 새롭게 선보인 공간으로, ‘곳 혹은 구석’을 의미하는 'Nook'을 상호에 사용한 만큼 내추럴한 우드 톤으로 색감을 맞춘 내부는 아늑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브라세리(Brasserie)’는 프랑스에서 고급스러운 레스토랑과 캐주얼한 비스트로 그 사이의 식당을 의미하는데, 이곳에서 선보이는 잠봉 에그베네딕트, 샥슈카 등 다양한 브런치 메뉴 또한 합리적인 가격대로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 반드시 먹어야 하는 메뉴는 바로 직접 만드는 ‘미트 파이’. 파이를 한 번이라도 먹어본 이들은 ‘인생 파이 맛집’이라고 극찬할 정도다. 취향에 따라 미트, 풀드포크, 치킨, 머쉬룸 4가지 종류의 파이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데, 매장에서 먹을 경우에는 파이에 곁들일 수 있는 매쉬드 포테이토가 곁들여 플레이팅 된다. 버터의 풍미가 느껴지는 겉바속촉 파이, 듬뿍 들어간 고기, 부드럽고 고소한 매쉬드 포테이토의 조합이 삼위일체를 이룬다. 특히 햇볕 잘 드는 야외 테라스 자리에서 즐기는 브런치는 해외 여행이 남부럽지 않은 분위기를 완성한다. 그렇다 보니 오픈하자마자 야외석부터 빠르게 만석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자리에 그리 연연할 필요는 없다. 내 취향의 근사한 브런치 한 접시를 여유롭게 즐기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기분으로 충만해질 테니까.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영감
체스트넛 룸(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산두로 117 1층101호)
‘체스트넛 룸’은 눈과 입으로 동시에 맛보는 오픈 토스트 맛집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밤리단 보넷길의 대표적인 핫플레이스이자 미국식 브런치 맛집인 '지미스'가 새롭게 선보인 카페 겸 편집숍으로, 홈메이드 식료품을 중심으로 감각적인 의류 잡화 또한 공간 한편에서 판매한다. 상대적으로 심플한 외관과 달리 다양한 소품과 식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아담한 가게 내부는 마치 예술가의 작업실처럼 독특한 감각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자유분방한 붓질이 느껴지는 벽면조차 예술적인 느낌이 가득하다.
스스로를 '잼과 치즈 가게'라고 소개하는 이곳에서는 매일 각종 잼과 리코타 치즈 등을 직접 만들어 판매한다. 테이블 위와 냉장고 안에는 언제나 알록달록 선명한 수제 잼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진득하고 상콤달콤한 맛이 연상돼 입안에 침이 고이는 듯하다. 건강하게 만든 수제 잼인 만큼 과하게 달지 않고 과일 그대로의 맛을 살린 은은한 단맛은 평소 디저트류를 가까이하지 않는 이들도 맛있게 즐길 수 있을 정도. 대표 메뉴인 오픈 토스트를 주문하면 바삭하게 구워낸 사워도우 토스트 위에 취향에 따라 주문한 수제 잼과 신선한 리코타 치즈 등이 듬뿍 발라져 나온다. 알록달록한 모습은 확실히 SNS에서 인기를 끌 법하지만, 그 맛은 단순히 인스타그래머블한 외양에만 집중하는 여타 카페의 디저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만든 이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맛이다. 자극적이고 인위적인 것들로 점철된 요즘 시대에, 무뎌져 있던 오감을 자연스럽게 되살려주는 이런 공간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기만 하다.
#Editor’s Spot
유유자적 이야기와 함께하는 여행, 고양동 높빛고을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양’하면 일산을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예로부터 이 지역의 중심은 고양동이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이국적이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장점을 살려 ‘고양시 고양동 높빛고을길’에는 마을해설사 골목투어 <높빛고을길 시간여행>이 운영 중이다. 마을해설사와 함께 ‘벽제관지-비석거리-600년 향교골 은행나무-고양향교-중남미문화원’ 순으로 2시간 일정의 도보 투어를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마을해설사는 주민을 비롯해 지역 활동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의 흥미로운 안내에 따라 동네 곳곳을 살피다 보면 고양동이 품어온 매력을 속속들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마침 걷기 좋은 가을날이니 이번 주에는 사신 맞이로 분주한 조선시대 외교 마을 이야기부터 멀고도 가까운 중남미의 화려한 문화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고양동의 시간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상세 내용은 고양시청 공식 블로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 황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