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동네 아는경기≫ 웹진 #7

한가을의 가평 기차 여행 PLAYLIST

이지현|

<아는동네 아는경기> 일곱 번째 골목. 가평 경춘선 시간 여행 거리


모든 여행의 시작과 끝은 골목으로 통합니다. 어느 낯선 골목에서 누군가는 잠자던 호기심을 일깨우는 보석 같은 장소를 발견하고, 누군가는 소란스러운 일상에서 잠시 로그아웃한 채 한갓진 골목을 걸으며 여유를 즐기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오래된 골목에 켜켜이 쌓인 시간을 더듬어가며 흥미로운 이야기 속을 탐험합니다. 경기도는 지역 고유의 이야기를 발굴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골목길이 될 수 있도록 관광테마골목 육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는동네가 소개할 경기도 골목 15곳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껏 몰랐던 경기도 구석구석의 매력을 경험하는 골목 여행자가 되어보세요. <아는동네 아는경기>는 10번에 걸쳐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여러분을 찾아옵니다.



한가을의 가평 기차 여행 PLAYLIST

기차 여행에는 변함없는 낭만이 있다. 미약한 덜컹거림과 함께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행선지로 달려갈 때의 설렘은, 정겨운 비둘기호와 무궁화호 열차가 세련된 KTX로 바뀌는 세월의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때 이어폰을 귀에 꽂고 주저없이 재생 버튼을 누를 수 있는 나만의 플레이리스트가 있다면 평범한 여행은 한결 특별해진다. “난 이래서 음악이 좋아. 지극히 따분한 일상의 순간까지도 의미를 갖게 되잖아. 이런 평범함도 어느 순간 갑자기 진주처럼 아름답게 빛나거든. 그게 바로 음악이야.”라고 말하던 영화 <비긴어게인>의 대사처럼, 이 순간을 좀 더 근사하게 만들 수 있는 음악의 힘에 기대보는 것이다. 좋아하는 노래와 함께 가평행 기차에 몸을 실은 어느 가을날. 재생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익숙한 노래의 전주가 흐르기 시작하면 눈앞의 풍경은 낭만을 한 겹 덧입는다. 청춘과 음악의 공간, 수많은 이들의 추억이 서린 가평을 목적지로 삼은 기차 한 대가 곧 출발한다.



Track.1 출발 - 김동률

“새로운 풍경에 가슴이 뛰고 별것 아닌 일에도 호들갑을 떨면서

나는 걸어가네 휘파람 불며 때로는 넘어져도 내 길을 걸어가네”



아침 9시, 가평으로 향하는 ITX-청춘열차에 올라탄다. 도착 예정 시간은 40여 분 후. 그건 곧 바깥 풍경을 구경하며 잠시 멍때리는 새에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말이다. 운행 속도가 빨라진 덕분에 당일치기 기차 여행도 가능해졌지만, 때로는 기차간에서 먹을 계란이나 사이다 따위를 가방 속에 바리바리 챙기던 옛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기억 속 어린 시절의 기차 여행은 다소 긴 기차 시간이 지루할 때도 있었지만, 미리 싸 온 간식거리를 신나게 나눠 먹거나 긴 객차를 앞뒤로 오가던 간식 카트를 애타게 기다렸다 사 먹는 재미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바뀌지 않은 게 있다면 기차에 올라탄 탑승객의 태도 정도일 것이다. 그때보다 훌쩍 커버린 나이임에도 달리는 기차의 창밖 풍경을 보는 일은 여전히 즐겁다. 되도록 창가 좌석을 사수하는 것 역시 창밖 풍경을 마음껏 보기 위함이다. 익숙한 도심의 풍경을 벗어나 서울 외곽을 향해 달리는 기차의 차창 밖으로, 가을볕에 물들기 시작한 산과 논밭이 배속으로 빠르게 재생되는 영상처럼 시야에 담긴다.



Track2. 언젠가는 - 이상은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가평은 음악과 이래저래 인연이 깊다. 우선 가을의 낭만을 만끽하기에 제격인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이고, 각종 음악 경연 및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로 여겨지는 ‘강변가요제’도 과거 이곳에서 열렸다. 1979년 경기도 가평군 청평 유원지에서 처음 개최된 강변가요제는, 이후 매년 7월과 8월이면 청평 유원지와 남이섬을 비롯한 북한강 변의 야외무대에서 열리며 1980~1990년대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다. 강변가요제는 1977년에 시작된 ‘대학가요제’와 더불어 신인가수의 등용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1984년 ‘J에게’로 대상을 받으며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선희, 1988년 대상 수상곡인 ‘담다디’로 전국에 개다리춤 열풍을 일으킨 이상은의 무대는 ‘강변가요제’ 하면 많은 이들이 떠올리는 대표적인 무대다. 전국 안방에 생중계되었다던 저화질의 옛 영상 속에서, 20대다운 풋풋한 모습의 참가자들은 내일의 스타를 꿈꾸며 참가곡을 열창한다. 그리고 가평의 맑고 푸르른 강변은 그때 그 여름 야외무대의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당시 노래를 꽤 부른다 싶은 대학생이라면 으레 마음 맞는 친구 혹은 선후배와 팀을 꾸려 한 번쯤은 강변가요제나 대학가요제에 참가해보기 마련이었다. 이들 경연에 참여하려면 대학생 신분이어야 했는데, 딱히 가수가 되겠다는 꿈이 없더라도 참가 자체가 대학 시절의 특별한 추억쯤은 되어주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경연 개최지였던 가평 역시 젊은이들의 성지로 자연스럽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또한 대학가에서 빼놓을 수 없던 MT 문화 역시 가평을 청춘과 젊음의 대명사로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MT 문화는 1970년대 경제 성장과 함께 대학가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서울 서부권 대학에서는 인천이나 대천 해수욕장 쪽을 MT 장소로 삼기도 했지만, 서울 소재의 대학생 대부분은 MT를 간다고 하면 주로 경춘선을 타고 가평이나 강촌역 일대에 모여들곤 했다.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싼 산과 시원하게 흐르는 강을 벗삼아 지내노라면 도시와는 다른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쏟아질 듯한 별빛과 밤새 타오르는 모닥불 곁에서 함께 기타를 치고 노래하던 낭만이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즐길 거리가 다양해지면서 MT 문화가 점차 시들해진 것처럼, 경춘선도 세월의 변화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2010년 12월 21일 경춘선 복선 전철이 개통되면서 이전의 단선 철로가 폐선의 수순을 밟게 된 것이다. 구불구불 흐르는 북한강을 따라 서울과 춘천 사이를 느릿느릿 달리던 경춘선 열차는 71년간의 운행을 끝내고 사람들의 아련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Track3.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 잔나비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 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서 남겨두겠소”



가평역에서 걸어서 15여 분이면 뮤직빌리지 ‘음악역 1939’에 다다른다. 음악역 1939는 2010년 경춘선의 폐선과 함께 문을 닫은 옛 가평역 일대를 오래전부터 음악과 연관성이 깊은 지역이라는 사실에 착안해 음악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곳에는 야외 공연장과 실내 공연장을 비롯해 스튜디오, 레지던스, 음악 체험관 등을 마련해두어 누구든 언제나 음악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다. 이때 이름에 들어간 ‘1939’는 경춘선 가평역이 처음 문을 연 해의 년도다. 다시 말해 오늘날 새롭게 열린 공간이 지난 역사의 연장선 위에 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명칭이다. 유유히 넓은 야외 공원을 거닐다 보면 홀로 우뚝 서 있는 폐열차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퇴역한 무궁화호 기관차와 객차 각 1량으로 구성된 이 공간은 ‘시간 여행 거리 열차’로, 한때 기차가 수없이 오갔을 옛 가평역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이다. 기차 카페 칸을 개조한 공간 내부에는 가평역과 경춘선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과 역대 강변가요제 LP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모습은 흘러가 버려 이제는 모두 옛일이 되어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추억의 노래가 잔잔히 흐르는 내부는 마치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양한 손님이 이곳을 찾아오며 내부는 금세 복작복작해진다. 기차에 탑승한 방문객에게 하나씩 나눠주는 작은 열차 티켓은 음악 시간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미션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열차 티켓을 반쪽으로 나눈 뒷면에 원하는 음표 도장을 찍고 벽면에 붙이는 것인데, 수많은 방문객의 손길로 벽면 곳곳에 빼곡히 채운 알록달록한 음표들의 모습은 마치 오선지 위의 음표들이 모여 하나의 악보를 완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 사이사이로 영롱한 오르골 소리가 들린다. 객차 양쪽에 준비된 오르골 작업실과 감상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그곳에는 오선지가 그려진 기다란 종이 위에 음계를 그려 넣듯 하나씩 펀칭을 해 오르골 악보를 만들어보는 체험이 마련되어 있는데, 미리 준비된 몇 가지 예시를 따라 추억의 노래를 오르골 악보화해볼 수도 아예 나만의 새로운 곡을 작곡해 볼 수도 있다.




방문객들에게 차례대로 프로그램 체험 방법을 안내해주던 공간 담당자는 오르골 악보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며 넌지시 이런 말을 귀띔해준다. “얼마 전 방문한 대학생 친구 서넛이 한참 동안 오르골 악보를 열심히 만들더라고요. 나중에 그 친구들이 두고 간 악보를 넣어 오르골을 연주해봤더니 신해철의 ‘그대에게’의 전주가 흘러나와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요. 지금 한 번 들려드리면 좋을 텐데 그새 어디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 아쉽네요.” ‘그대에게’는 대학가요제 심사위원이었던 조용필이 인트로를 듣자마자 대상으로 꼽았다고 알려진 명곡이다. 실제로 1988년 신해철이 속한 밴드 ‘무한궤도’는 ‘그대에게’로 그 해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았다. 과연 오르골로 연주되는 ‘그대에게’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퍽 궁금한 마음으로 얼마간 오르골을 만지작거리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다. 호기심 가득한 어린 자녀에게 오르골을 돌리는 법을 알려주는 젊은 부모, 함께 나들이를 나온 손주의 사진을 찍어주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옛 사진을 들여다보며 추억을 함께 곱씹는 중년의 커플과 레트로한 옛 물건들이 재미있는 어린 커플. 공간을 향유하는 방식은 저마다 달라도, 이 시간을 순수하게 즐기는 마음만은 남녀노소 모두가 매한가지인 듯하다.



Track4. Home Sweet Home - 카더가든

“하루 끝에 서서 닫힌 문을 열 때 Home sweet home”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오를 시간이다. 기차역으로 돌아오는 길 길가에 핀 코스모스와 고즈넉한 강변 풍경을 유유자적 구경하느라 예약해둔 기차를 하마터면 놓칠 뻔하기도 한다. 좌석에 등을 푹 기댄 채 뛰어와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출발하는 기차의 덜컹거림을 느낀다. 이대로 달려가는 기차에 몸을 맡기고 있다 보면 금세 종착역에 다다를 것임을 안다. 만약 원한다면 잠시 정차한 낯선 역에서 훌쩍 내려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생각지도 못한 여행이 언제든 새롭게 시작될 수도 있다는 점이, 예나 지금이나 기차 여행을 어딘가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것처럼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반복되던 일상을 벗어나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고픈 마음은 그 크기만 다를 뿐, 누구나 품고 있는 마음일 테니까. 다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의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안락한 집이 있는 덕분이라는 사실이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마음 한구석 외로움을 감출 길 없는 방랑의 모습을 하고 있을 테다. 그래도 음악이 있다면 이 세상 어디에 있든 마냥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들었던 노래를 다시 듣게 될 때마다 가을 향기로 온통 가득하던 이날의 순간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듯이, 노래가 재생되는 순간 기억 속 서랍 속에 소중히 보관된 지난 추억들의 온기에 잠시나마 기댈 수 있을 테니까.



#Editor’s Spot

타임머신을 탄 듯한 정겨운 옛 모습, 포천 이동갈비 골목


여기 또 다른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골목이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포천 이동갈비 골목이다. 포천 이동갈비의 역사는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참숯으로 구운 양념 쪽갈비가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처음 이동갈비를 판 음식점이 있던 포천시 이동면 장암리 일대에 갈비 골목이 형성되었고, 60여 년이 지난 지금은 100여 개의 이동갈비 식당이 도로를 따라 줄지어 들어서 있다. 수십 년째 대를 이어 운영해오는 노포부터 젊은 세대의 입맛에 맞춘 갈비 메뉴를 개발해 파는 요즘 식당까지 다양한 매력의 이동갈비 식당이 영업 중이다. 대개 포천에 오면 이동갈비를 먹고 인근 관광지로 동선을 잡곤 하는데, 이때 식당들이 밀집한 메인 도로에서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레트로 감성이 물씬한 옛 골목길을 만날 수 있다. 1970~1980년대 ‘포천의 명동’이라 불리던 화려했던 골목은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다. 인근에 군부대가 많았던 만큼 세탁소, 문방구, 식당, 다방 등 군인들을 대상으로 하던 상점들의 흔적도 눈에 띈다.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옛 감성을 그대로 간직한 골목은 마치 영화 세트장 같기도 한 운치를 자아낸다. 전성기 시절, 이 골목은 주말이면 전국에서 이동갈비를 먹으러 오는 인파뿐 아니라 인근 부대 군인과 그 가족들로 북적였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간 골목에는 문 닫힌 낡은 상점들이 늘었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골목길에는 여전히 정겹고 따뜻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으니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은 날 포천 이동갈비 골목으로 훌쩍 떠나보기를 권한다.


사진. 이지현

에디터

이지현

삶을 음미하며 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