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동네 아는경기≫ 웹진 #10

나의 사랑, 나의 북변동 :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

이지현|

<아는동네 아는경기> 열 번째 골목. 김포 북변동 백년의 거리


모든 여행의 시작과 끝은 골목으로 통합니다. 어느 낯선 골목에서 누군가는 잠자던 호기심을 일깨우는 보석 같은 장소를 발견하고, 누군가는 소란스러운 일상에서 잠시 로그아웃한 채 한갓진 골목을 걸으며 여유를 즐기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오래된 골목에 켜켜이 쌓인 시간을 더듬어가며 흥미로운 이야기 속을 탐험합니다. 그동안 <아는동네 아는경기>가 10번에 걸쳐 전해드린 경기도의 골목 이야기와 함께 즐거운 골목 여행 보내셨나요? 경기도 구석구석의 매력을 담아낸 경기도 골목 15곳의 이야기를 시작점 삼아, 우리 주변 곳곳에 숨어 있는 골목의 매력을 직접 발견하고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 보세요. 경기도는 앞으로도 지역 고유의 이야기를 발굴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골목길이 될 수 있도록 관광테마골목 육성 사업을 지속해나갈 계획입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경기도의 다양한 골목으로 훌쩍 떠나기만 한다면, 새로운 여행은 언제나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북변동 :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

세월의 흐름 속에서 우리 주변의 많은 것들은 변화와 마주친다. 사람이 모여 사는 동네는 마치 유기체와 같아서 당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필연적으로 변화를 겪기 마련이다. 김포의 오래된 동네, 북변동에도 한때 ‘김포의 명동’이라 불릴 만큼 화려한 시절이 있었다. 90년대까지 북변동은 김포의 유일한 상업지구인 동시에 교육, 행정, 문화의 중심으로 여겨졌지만, 오늘날 이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도시 개발에서 밀려난 구도심 특유의 풍경이다. 하지만 그저 조금만 시선을 달리 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의 세상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건 다시 말해 너무나 익숙해서 스쳐지나가던 것들로부터 특별한 가치를 찾아내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동네의 생기를 되찾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동네와 골목을 애정하며 이 지역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보면, 북변동이라는 동네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 수 있을지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SPOT 1. 해동1950 (since 2020)

: 여운태 어웨이크 대표


ⓒ여운태

카페 겸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 중인 ‘해동1950’은 북변동에서 매우 상징적인 공간이다. 무려 1950년부터 영업해온 이 지역의 대표 서점이 한때 폐업을 겪었다가, 2020년 지역 주민 모두에게 열린 문화 재생 공간으로 새롭게 탈바꿈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고향인 김포 북변동을 기반으로 오랫동안 지역 활성화에 힘쓰고 있는 여운태 어웨이크 대표의 열정과 진심이 담긴 노력이 빚어낸 결과다. 그는 이웃 주민과 나누는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동네의 흥미로운 로컬 콘텐츠를 발굴하고, 오래된 것에 낯선 시선과 재주 좋은 손길을 덧대 새로운 매력을 이끌어낸다. 오랫동안 변함 없는 것들의 이름을 소중하게 불러주고 더없이 사랑하는 방식으로도, 시간이 멈춘 듯한 동네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음을 여 대표는 자신의 뚝심 있는 행보로 몸소 증명하고 있다.




‘해동1950’의 1층과 2층 벽면에 오래된 해동서점 사진이 걸려 있잖아요. 보면서 사진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무척 궁금하더라고요.

저 가운데 앉아 계신 분이 김성환 선생님인데요. 저 분께서 고향인 김포에는 책 읽을 곳 하나 없다는 생각에 동아일보 기자직을 내려놓고 이곳에서 ‘해동서점’을 시작하신 거예요. 그때가 1950년이고요. 이후 아드님인 김기율 선생님이 물려 받아 운영을 계속하셨는데, 인터넷 서점이 보급화 되면서 운영이 많이 힘들어졌죠. 그래서 1층에 있던 서점이 지하로 내려가고 나머지 공간을 세를 주면서 버티고 버티다가 2010년에 결국 문을 닫게 된 거고요. 저는 이 동네에서 2006년부터 사업을 하다가 2015년부터 동네 일을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저희 동네를 보면서 ‘슬럼화됐다’, ‘무섭다’라는 말을 하면서 다른 신도시에서 사업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많이들 제안했는데요. 고민을 거듭하다가 문득 ‘내가 사는 동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동네를 살리는 일들을 하고자 동네를 알리거나 활성화시키는 일을 하며 이곳을 ‘100년의 거리’라고 이름 짓고, 같은 이름의 동네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죠.


어떻게 옛 해동서점을 지금과 같은 공간으로 바꾸실 생각을 하셨는지 그 과정이 궁금해요.

북변동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항상 나오는 주제가 ‘해동서점’이었어요. 해동서점이 아직 있는지 묻거나 서점이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들 너무 안타까워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해동서점에 대한 강한 향수를 느끼더라고요. 옛날에 김포에서는 해동서점이 지금의 교보문고 같은 곳이었던 셈이거든요. 이런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해동서점이 이 지역에서 정서적으로 너무 중요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2018년 당시 건물주인 김기율 선생님을 찾아간 거예요. 해동서점을 복원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지하 서점 자리를 보여주시면서 무료로 줄 테니 마음껏 사용해보라고 하셨고요.






그런데 폐업 이후 관리가 안 되어서 물이 발목까지 차 있고, 말 그대로 썩어 있는 공간이나 다름 없었거든요. 그런 공간을 깨끗한 컨디션으로 복원해 놓고 나니까 선생님께서 최대한 임대료를 적게 받을 테니 이 건물 전체를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을 주셨어요. 그러면서 이 건물만큼은 아버님의 뜻에 따라 오래 전 해동서점처럼 지역 내의 문화적 허브 역할을 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름도 여러 가지를 고민하다가 해동서점의 정체성을 그대로 가져가자는 생각으로 서점의 설립 연도를 딴 ‘해동1950’으로 이 공간의 이름을 지은 거예요. 결과적으로 저희가 ‘해동’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어떻게 보면 이전 공간을 승계한 셈인데요. 공사를 끝내고 2020년에 ‘해동1950’을 처음 열었을 때, 김성환 선생님과 김기율 선생님이 함께 찾아오셔서 이 공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에 대해 정말 많이 기뻐하셨어요.


김포 북변동을 소재로 한 다큐 영상 속에서 동네 어르신들을 포함해 상인분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고 꾸준히 소통하는 모습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지더라고요. 다양한 지역 주민분들과 지금의 유대를 쌓기 위해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 같아요.

제가 2015년부터 ‘100년의 거리’라는 이름으로 이곳에서 지역 축제 이벤트를 해왔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주민들이 이런 걸 왜 해야 하는지 이해도 못하시고, 저를 외지인처럼 보시더라고요. 제가 김포 출신이라고, 바로 여기 김포초등학교 나왔다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말이에요. 그런데 돌아보면 그 당시 저는 되게 오만했던 것 같아요.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동네가 슬럼화되어 있고, 그러면 공연이나 플리마켓 등의 다양한 문화가 들어와서 좀 더 활기가 생기면 주민분들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제가 주민분들과 안 친했던 거죠.





그래서 2016년부터는 여기에서 동네 살이를 제대로 했어요. 머리도 근처 2대째 운영하는 영미용실에서 자르고, 고장난 시계도 고치고, 옷도 수선하고, 밥도 이 동네에서 먹고요. 그렇게 보내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주민분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도 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자꾸 생기는 거죠. 사실 처음에는 이 동네에 있는 노포들에 대해 관심이 그리 없었어요. 그런데 어르신들하고 친하게 지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까 가게들 모두가 정말 오래됐고, 저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예를 들어 지금도 가게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를 보면 이 동네에서 전화기가 놓인 순서를 알 수 있어요. 그리고 해동1950 앞에 놓여 있는 빨간 우체통에 숫자 ‘1’이 적혀 있는 건 김포에서 첫 번째로 놓인 우체통이란 뜻이고요.


그러한 시간을 통해 쌓인 유대감이 대표님의 이후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떠셨어요?

이전에 저는 동네가 슬럼화 된 이유가 도시의 팽창에 따른 관공서의 이전 때문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주민분들하고 인터뷰를 하다 보니까 ‘차부 이전한 게 제일 크지’라고 말씀들을 하시는데, 김포 사투리로 터미널을 ‘차부’라고 부르거든요. 알고 보니 터미널이 이전한 것에 대한 큰 상실감 같은 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터미널 건물주를 찾아가서 “동네에서 축제를 다시 한다면 이 터미널에서 다시 해보고 싶다”고 했더니 기꺼이 한 번 해보라고 하시면서 1층 공간을 다 철거해 주셨어요. 과거에 이곳이 서울 신촌을 바로 연결하는 직행 터미널이 있던 자리였기 때문에 당시 진행한 축제 명이 ‘예술 직행 차부’였어요. 그곳에서 3일 동안 DJ, 힙합 댄스 등 다양한 스탠딩 공연 등을 진행했는데, 어르신들이 3일 내내 오셔서 자리를 함께해주신 거예요. 어르신들이 앉게 의자 달라고 하셔서 직원들이랑 부랴부랴 의자 세팅해드리고 했는데, 당시 사진을 보면 되게 재미있어요. 사람들이 공연을 보며 서있는 가운데에 어르신들이 앉아 계시다 보니 그 부분만 움푹 파여 있거든요. 그때 어르신들이 가시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리 지켜주는 거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다음에는 우리가 들을 만한 노래도 좀 해달라”고 덧붙이셨고요(웃음). 바로 그게 2015년에 진행했던 첫 행사와 2017년에 지역 축제를 진행했을 때의 아주 큰 차이인 거죠.





대표님께서는 동네를 바꿔가는 현장에서 직접 뛰시다 보니 아무래도 동네의 변화를 가장 먼저 체감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동네가 현재 뉴타운 재정비 촉진구역이에요. 재개발 지역이라 주민 간에 찬반 의견이 제일 강하게 대립하는 지역 중 하나인데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저희 어르신들이 “우리한테는 100년의 거리가 있잖아”라는 얘기를 하기 시작하시더라고요. 지금 이 거리를 보면 줄 전구가 달려 있거든요. 전에는 저녁 6시가 되면 대부분의 가게가 불을 끄니까 가로등이 있는데도 이 거리가 너무 어둡고 무섭다는 주민들 의견이 있었어요. 거리를 좀 더 환하게 만들기 위해 저희가 줄 전구를 달았고, 전기료는 동네 주민인 사장님들이 나눠 내주고 계세요. 이쪽 라인은 신나라 노래방 사장님이 내주신다고 하셔서 그곳에 전기를 꽂고, 저 건너편 라인은 한의원 원장님이 내주신다고 하셔서 그곳에 전기를 꽂고요. 그 덕분에 이 거리가 밤에도 지금처럼 밝아진 거죠. 그런데 저희가 했다는 말도 안 했는데, 동네 어머님이 오셔서 “거리가 밝아져서 너무 좋아”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한 거 어떻게 아셨냐고 여쭸더니 “이 동네에서 이런 일 하는 사람이 너 밖에 더 있겠니”라고 말하시더라고요.


이렇게 조금씩 뭔가 개선이 되어 가는 것들, 그리고 거기에 동네 주민분들도 조금씩 계속 마음을 보태어 주시는 모습을 보면 동네가 점진적으로 변화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신 부동산을 운영하는 할아버님이 저에게 자꾸 매물 정보를 알려주시기에 한 번은 “왜 저만 보면 매물 얘기를 그렇게 하시냐”고 여쭤 보니까 어르신 말씀이, “동네에서 뭐라도 하겠다는데 돈으로 보태주지는 못해도 좋은 매물을 찾아주고 가격이라도 좀 더 깎아주는 일만큼은 본인께서 도와줄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씀에 마음이 찡했어요. 저한테 필요해 보이니까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으셔서 그렇게 하신 거잖아요. 제가 공간을 개업하면 동네 어르신들이 “개업날인데 휴지 못 사와서 미안해”하시면서 몇 만 원씩 한데 모은 돈 봉투를 주시곤 해요. 그 안에 편지처럼 동네 어르신들 이름이 써 있어요. 저는 그런 마음 자체가 너무 감사하고, 이 동네의 의미 있는 변화를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젊은 층의 지역 내 유입을 위해 창업 시 다방면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다양한 청년들이 이 지역에서 자생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여러 활동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동네의 젊은 친구들은 대표님을 ‘김포 밥아저씨’라고 부르기도 하더라고요. 그러한 별명으로 불리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가 예전부터 동네 청년들 모으려고 ‘김포동네 파티’라는 걸 기획해서 대접했어요. 그러다 파티만 해서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밥 모임을 하기 시작했고요. 처음에는 피자나 치킨을 사주면서 같이 이야기하고 그랬는데, 제가 매일 밥을 사주니까 애들이 되게 부담스러워하더라고요. 그러다 하루는 제가 부대찌개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 동네 애들한테 밥 먹으러 오겠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이전에는 먼저 얘기를 안 하던 애들이 저한테 친구 한두 명 더 있는데 데려가도 되냐고 묻더라고요. 그때 깨달은 게 피자는 한 명 더 데려갈 수가 없는 거예요. 한 명 더 데려가면 누구는 덜 먹어야 되니까. 그런데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되니까 같이 와서 먹어라”는 옛날 어르신들 말씀처럼 밥은 더 편한 마음으로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더라고요. 제가 카레를 되게 좋아하는데 제가 만드는 카레가 좀 특이해요. 고형 카레에 우유와 크림만 넣고 카레를 끓이거든요. 그 카레가 너무 맛있다고 해서 저희 동네에서 행사할 때마다 그걸 끓여서 항상 내놓았더니 그거 먹고 싶어서 오는 애들이 점점 생기는 거예요. 일단 요리에 이름이 필요하니까 ‘김포 밥아저씨 카레’라고 이름을 붙이고, 저는 매일 밥 주니까 밥 아저씨가 된 거고요.


이곳의 로컬 콘텐츠가 힘을 얻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강연을 하거나 동네를 설명할 때 “저희는 다른 동네처럼 큰 건물이나 멋있는 하드웨어가 있지는 않다”고 말해요. 다만 저희 동네를 보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동네 같지만, 그 안을 살펴보면 어디에서나 볼 수 없는 동네이기도 하거든요. 이곳에 유일하게 쌓여 있고,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한 것들이 분명 있어요. 결국 저는 동네를 읽는 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예술을 하던 어떤 친구가 이 동네를 처음 보고 “을지로 뒷골목 같아요. 너무 힙하고 멋져요.”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때 이곳을 저마다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다양한 사람들이 발견한 각양각색의 요소들이 모여 동네를 더 풍성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거죠.





김포 5일장의 경우도 이 지역에 오랫동안 살던 분들은 지저분하다거나 비위생적이다, 복잡하고 주차가 안 되어서 불편하다는 시각으로 보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설명하죠. “김포 5일장은 경기 4대장 중에 하나이고, 부지 면적 3천 평이라는 점에서 보면 전국에서 가장 큰 장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등갈비나 칼국수 등을 줄을 서서 먹는데, 상설장이 아니다 보니 그 거대한 부지에 하루 동안 장이 쫙 섰다가 하루만에 사라져 버린다. 이처럼 마법 같은 장이라는 게 가장 큰 매력이고, 그게 곧 희소성 있는 콘텐츠가 된다. 코드 넘버는 27이다. 2와 7이 들어간 날짜에만 열리는데, 날짜를 못 맞추면 방문하고 싶어도 볼 수 있는 방법이 절대 없다.” 이런 식으로 동네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알려주면 사람들이 김포 5일장이 그런 곳이었냐며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하거든요.

다시 말해 우리 동네에 있는 콘텐츠가 얼마나 독보적인지, 콘텐츠로서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재입증하는 과정이 가장 필요하다고 봐요.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동네의 장소를 지도화하는 작업을 1년에 한 번씩은 진행 중이에요. 누군가가 이 동네에 찾아와 한 가지 장소만 보고 가는 게 아니라, 이곳에 얼마나 흥미로운 장소들이 있는지를 알려주고 어떤 식으로 즐길 수 있는지 알 수 있도록 각 장소의 연결점을 만드는 일을 하는 거죠. 이러한 로컬 콘텐츠 큐레이팅과 동네 투어와 같은 가이드를 통해 동네의 다양한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인지시켜 나갈 수 있고요.




그야말로 ‘북변동 골목 대장’인 대표님의 다음 목표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동네를 바꾼다는 일이나 로컬 크리에이터라는 게 뭔가 거창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생존과 연결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처음에 이곳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는 ‘나만 잘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동네가 함께 살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잘해도 한계가 있다는 점을 체감했고, 동네와 함께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많이 경험했어요. 어쩌면 동네를 살린다는 일이 그리 거창한 개념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저 동네를 조금 더 따뜻하게 보고, 조금 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일 수 있거든요. 그리고 그 시작은 ‘우리 동네가 내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에서 비롯되는 거고요. 저희는 2015년부터 지금까지 긴 시간을 들여 천천히 동네에서 많은 것들을 해왔기 때문에 주민분들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어요. 앞으로 저희의 활동이 다른 지역에서 참고할 만한 좋은 사례이자 롤모델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지역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시는 많은 분들이 너무 성급하지 않게 조금 더 긴 시간을 들여 동네와 차근차근 관계를 쌓아가는 활동을 해갔으면 좋겠어요.



SPOT 2. 태화관 (since 1959)

: 공명 2대 사장 & 손옥영 원조 사장



중국집 ‘태화관’은 무려 63년이라는 업력을 자랑하는,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 중 한 곳이다. 손옥영 원조 사장은 ‘태화관’이라는 간판을 처음 달고 반백년 넘는 세월 동안 가게를 운영해온 장본인인 만큼 북변동 역사의 산 증인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 가게를 7년 전 인수한 공명 2대 사장은 주방 일을 도맡으며 현재 실질적으로 태화관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2대 사장님은 주방과 배달을, 원조 사장님은 홀을 담당하며 한 공간에서 함께 일한다는 점이 바로 이 중국집의 재미있는 점이다. 이렇듯 두 분의 사장님이 각자의 자리에서 능숙하게 손발을 맞추며 운영 중인 아주 오랜 중국집은, 언제 봐도 더없이 정겹고 반가운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지금 보니까 주방에서 직접 면을 뽑으시더라고요. 요즘에는 면을 사다 쓰는 곳도 많은데, 여전히 직접 반죽해서 뽑으시네요.

공명 2대 사장님(이하 공): 그게 정석이지. 주방 입구에 있는 저 초록색 기계가 반죽기잖아. 거기에 밀가루 넣고, 물 넣고, 소금 넣고. 다른 거 넣지 말고 소금만 넣어야 돼. 요즘에는 제대로 안 하는 집이 많아. 요즘에는 면이든 재료든 공장에서 다 나오잖아. 그런데 그러면 맛이 없지.


‘직석냄비삼선해물짬뽕’은 보기에는 새빨개서 엄청 매울 것 같은데, 전혀 자극적이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시원하고 얼큰한 국물 맛 덕분에 계속 먹게 돼요. 사장님만의 비법이 있나요?

공: 짬뽕은 무조건 오징어를 써야 돼. 오징어에서 우러나오는 맛이 있거든. 다른 집은 가격이 싼 대왕 오징어를 쓰기도 하지만, 그러면 안 돼. 2인분을 시키면 이렇게 냄비에 나오는데, 낙지도 한 마리 들어가고, 전복도 들어가. 그 외의 재료는 그때그때 시장에서 싱싱하고 가격 좋은 것들을 사서 넣고. 예를 들어 오늘은 바지락을 넣었지만, 내일은 대합이 들어가. 재료가 신선하고, 그때 그때 주문 들어올 때마다 바로 요리하니까 음식이 맛이 없을 리가 없지.





사장님께서는 중화 요리 경력이 총 몇 년 정도이신 거예요?

공: 내 나이가 58세인데, 40년 경력 더 된다고 봐야지. 아주 어릴 때부터 했으니까. 우리 집이 짜장면집이야. 어릴 때부터 아버지 어깨 너머로 배우고, 배달도 다니고 했어. 우리 화교들은 주로 이쪽 계통에서 일해. 여기 원조 할머니도 마찬가지야. 할머니가 나랑 같은 세대인데, 할머니도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어. 그러니까 할머니나 나나 부모님이 한국에서 중국집을 운영한 1세대 화교이고, 우리는 2세대인 거지. 유명한 중국집들 보면 거의 다 우리 연희동 동창이야.


저는 2대 사장님께서 가게를 인수했다고 하셔서 원조 사장님은 못 뵐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함께 일하시는 모습이 신기해요.

공: 이 분은 태화관에 애착이 있어. 옛날에 북변동에 와서 이 집을 짓고, 돈 벌어서 자식을 키웠으니까. 지금도 원조 할머니가 홀 서빙하며 같이 일해.




그럼 2대 사장님은 주방을 담당하시고, 원조 사장님은 서빙을 담당하시는 거예요?

공: 내가 요리하느라 바쁘잖아. 그러니까 원조 할머니는 서빙을 맡다가 내가 배달을 가느라 주방이 비면 그때는 요리까지 하는 거지. 그리고 우리 할머니는 손님 오면 절대 안 놓쳐.

손옥영(이하 손): 아니, 왜 놓쳐. 옛날에 손님이 줄을 설 정도로 그렇게 바빴는데도, 나는 안 놓쳤어. 빨리 손님 모시고, 빨리 그릇 치우고 하면 되지.

공: 맨날 나한테 뭐라고 하잖아. 음식 느리게 한다고(웃음).


이 동네의 옛 모습에 대해서도 듣고 싶은데요. 옛날에는 북변동을 ‘김포의 명동’이라고 불렀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기억나는 모습 있으세요?

손: 여기 김포 초등학교가 있잖아. 김포에 13군데 읍·면·동이 있는데, 그곳의 학교들이 다 여기 와서 운동회를 했어. 운동회 날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줄을 서고, 장사가 너무 잘 됐어. 그런데 이제는 여기 학교에 다니는 학생 수도 적어졌지.

공: 40년 전에는 여기가 최고 번화가였어.

단골 손님(이하 단): 여기가 ‘48번 국도’라고 강화 가는 길이었어요. 이 가게 바로 앞에 버스 터미널이 있었고요. 그 당시 나는 신촌에 살았는데, 신촌에서 탄 강화 버스가 여기 터미널에 와서 손님들을 한 무더기 내려주고, 또 다른 손님들을 태워서 강화까지 갔어요. 여기 엄청 났어요. 사람들은 붐비고, 차들은 막 밀리고. 그러다 신 버스 터미널이 생기면서 이 근방부터 단층 건물을 허물고 2~3층짜리 건물을 막 짓기 시작한 거예요.






아무래도 터미널의 존재가 동네의 유동 인구에 영향을 많이 미쳤겠어요.

단: 여기 가게 앞 도로가 원래 48번 국도가 있던 자리예요. 그러다가 지금의 김포시외버스터미널 있는 자리로 옮겨갔었고요. 그 다음에 지금처럼 시내 바깥으로 달리는 도로가 생겼는데, 외곽 도로가 훨씬 빠르니까 나중에는 48번 국도가 그쪽으로 변경된 거예요. 총 네 번이 바뀌었죠. 메인 도로가 이동하면서 이 길은 일반 도로가 된 건데, 그러니 예전만큼 사람들이 이쪽으로 유입이 되기 어려운 거고요.


옛날에 비하면 유동 인구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이 가게를 찾는 손님이 많잖아요.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공: 일단 우리 가게 음식이 맛있기도 하고, 그리고 원조 할머니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

손: 응, 우리 집 단골이 많아. 요즘도 많이들 찾아와.

단: 나도 저기 멀리 사는데 지금도 전기 자전거 타고 와요. 이 집 볶음밥이 최고야.

공: 저희는 장사가 잘 되는 편이에요. 맛있다고 꾸준히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으니까요. 맛 없으면 찾아오겠어요?



SPOT 3. 게으른정원 (since 2020)

: 이소현 대표



어느새 운영 3년차에 접어든 ‘게으른정원’은 북변동의 유일한 독립서점이다. 이소현 대표는 쉬어가고 싶은 누구나 이곳에 언제든 찾아와 문장에 기대고, 영혼을 채워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공간을 열었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에게 기대는 것보다 책 한권, 문장 한줄에 기대는 것이 더 힘이 될 때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쓰임새는 방문객 저마다에게 달려 있다. 이 대표가 한 권 한 권 직접 읽고 정성껏 큐레이션한 책을 골라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삶을 더 폭넓게 확장해나가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운영되어가는 작은 책방의 존재는, 마치 정원을 가꾸듯 동네를 바라보는 시선을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가꿔나간다.






‘게으른정원’의 활동을 살펴보니 단순히 책을 읽거나 구입할 수 있는 서점의 기능 이상으로 커뮤니티 역할에 충실한 곳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이곳에서 다양한 커뮤니티를 만들어나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도 처음에 이렇게 다양한 모임을 운영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결국 책방이란 것이, 로컬로 향하게 되더라고요. 책방에는 제가 찾아다니지 않아도 알아서 좋은 사람들이 모여요.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이 모이고요. 사람들과 제 취향 사이의 접점에서 모임을 몇 개 운영하다 보면 '아, 이들이 이 시간을 정말 기다리고 있었구나'라는 것을 느끼며 보람을 얻기도 해요. 그리고 책방이 거점이 되고 책이 매개가 되어 '안전하고 건강한'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고, 그 연대가 개인에게 안정감을 준다는 것을 저 역시도 직접 경험했거든요.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동네 손님’이자 '동네 친구'들이 돕고, 함께 해내는 경험을 지난 2년간 해온 것 같아요. 앞으로도 이 공간을 통해 손님들에게 '안전하고 건강한' 커뮤니티를 제공해드리고 싶어요.


현재 게으른정원에서 운영 중인 모임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지금 운영 중인 모임은 두 개의 정기 독서 모임과 뜨개 모임, 글쓰기 모임이 있어요. 정기 독서 모임의 경우는 유료의 비용을 지불하고 한 달에 1번씩 정기적으로 만나는 고정 북클럽이고요. 멤버들의 친밀도와 단합력이 높아요. 뜨개 모임과 글쓰기 모임은 매주 일요일마다 무료로 운영하고 있는데, 단골 손님들 위주로 비공식적으로 운영되는 모임이고요. 한때 나만의 작업 공간이 필요한 개인에게 책방의 한쪽 공간을 언제든 와서 사용할 수 있도록 내어주는 ‘작업실 멤버십’을 운영하기도 했는데요. 책방 운영 시간이 주 3일로 변동되면서 현재는 진행하지 않고 있어요.





사람들을 모을 수는 있지만, 초기 자본이 많지 않아 북변동을 선택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실제로 북변동이라는 지역에서 직접 독립서점을 운영하며 느끼는 장점과 단점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가장 좋은 점은 월세가 저렴하다는 거예요. 북변동이라는 동네를 알고나서부터 책방 비즈니스가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이 정도 월세라면 한 번 감당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북변동은 초기 자본이 부족한 젋은 창업자에게 시작할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동네였어요. 다만 월세가 저렴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죠. 이곳은 구도심인 만큼 인적도 드물고, 지나가던 손님이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는 동네는 아니에요. 그렇기에 창업자가 직접 SNS 등을 통해 똘똘하게 마케팅하려는 의지가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어요.


바로 옆 ‘해동1950’의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 이곳에서 마실 수도 있더라고요. 이처럼 인근 가게와 연계해 운영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저희 공간 하나만 보고 북변동을 찾아와주시는 손님들의 편의를 위한 선택이었는데요. 책을 읽을 때 커피 한 잔을 곁들일 수 있다면 훨씬 좋잖아요. 게으른정원은 책에 집중하는 공간이기에 어설프게 커피를 다루고 싶지 않았고, 커피 제조나 응대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책방 운영에만 온전히 사용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지금의 방법을 택하게 된 거죠. 꼭 해동1950의 커피만을 반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원한다면 집에서 커피를 직접 내려와도 된다고 안내하고 있어요.





인근의 ‘미사랑 백화점’에 대해 ‘보물 같은 곳’이라고 설명한 대표님의 인스타 피드를 보고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곳에서 어떤 근사한 아이템을 발견했는지 궁금해요.

저는 보통 미사랑 백화점을 ‘김포의 동묘’라고 많이 소개해요. 누군가에게 쓸모없어진 낡고 오래된 물건을 파는 골동품 가게지만, 다정한 눈으로 관찰하면 그 안에서 정말 보물 같은 아이템들을 발견하게 되거든요. 저는 서점 오픈을 준비하던 당시에 그곳에서 독특한 디자인의 의자, 책상, 선반, 화병 등을 아주 저렴하게 사왔었어요. 좀 먼지가 쌓이고 때가 묻긴 했어도, 데려와서 잘 닦아주고 본래의 용도를 찾아주면 다시금 물건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아요. 그 즐거운 경험을 저희 손님들도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이곳의 젊은 소상공인이자 로컬 크리에이터로서 동네에서 느끼는 변화가 있는지도 궁금한데요. 다소 더디더라도 어떤 면이 변했다고 느끼는지, 혹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제가 북변동이라는 곳에 터를 잡고 책방을 운영하고 있으니, 이 동네의 움직임에 대해 제게 많이들 여쭤보시는 것 같아요. 2년동안 이 동네에 머물면서 실질적인 변화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렇지는 않다”라고 대답할 것 같아요. 실제로 북변동의 내부인들, 그러니까 이곳에서 생계를 이어나가고 계신 분들은 그렇게 느끼실 거예요. 그냥 이 동네에 살면서 흘러가고 있는거거든요.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게으른정원에 찾아온 손님들이 북변동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인식’하고 있다는 거예요. 지속적으로 이 동네를 인지하고 바라보는 움직임이 있고, 그리고 그 인식되는 이미지가 긍정적이라는 것. 외부인들이 북변동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나도 여기서 무언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물음표를 갖게 되었다는 건 큰 변화라고 볼 수 있겠죠. 실제로 저희 건물 4층에 뜨개를 취미로 하던 친구가 클래스용 작업실을 차리기도 했고요.





’게으른 정원’을 운영하며 가장 좋았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책방 안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을 때. 그들 각각의 손에 저마다 다른 책이 쥐어져있고, 손 위에 들려있는 책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그 ‘몰입’의 순간을 정말 애정해요. “책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리라”라는 어떠한 사명감을 갖고 이 책방을 오픈했잖아요. 그래서 아무래도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책을 읽는 모습을 볼 때가 가장 보람되고 행복해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살아간다는 것은 나만의 작은 정원을 가꾸는 일’이라는 말을 좋아해 가게 이름에도 ‘정원’이라는 단어를 넣었다고 인터뷰하신 적이 있으시죠. 앞으로 이 서점과 대표님의 삶을 어떤 모습으로 가꿔나가고 싶으신가요?

지금 돌이켜보면 저는 지난 2년이 ‘책방을 운영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가능한 것인지, 가능하다면 어떤 모양의 삶까지 가능한 것인지 계속해서 실험해 온 시간으로 느껴져요. 한때 저도 회사에 온 에너지를 쏟아가며 일하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회사를 그만두고 ‘앞으로는 나를 200%를 쏟아도 아깝지 않을 일을 하고 싶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떠오른 게 바로 책방이었어요. 그러니 이 일을 ‘지속가능한 형태’로 오래 이끌어가는 게 첫 번째 바람이고요. 더 나아가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책방이라는 공간을 넘어 단순히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소개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럼으로써 제 자신이 조금 더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책방을 과감하게 주 3일 여는 책방으로 재정비한 것도 그런 이유가 컸어요. ‘이런 삶의 모습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는 어떨까?’하고 끊임없이 실험해 나가는 거죠.




살아간다는 것은 경주가 아니라 결국 나만의 작은 정원을 가꾸는 일이라는 말, 제가 정말 좋아하는 문장이에요. ‘누가 더 빨리가나’, ‘누가 더 잘 사나’ 겨루는 게 아니잖아요. 각자가 원하는 가치관을 실현할 수 있는 자기만의 정원을 만들어서 살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정원을 만들기 위해 별다른 기술은 필요하지 않아요. 그저 내가 원하는 모양새로 한 번 살아가 보겠다는 용기, 나 자신에게 허용해주는 너그러움만 있다면 가능해요. 많은 분들이 자신만의 정원에서 아름답게 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라요.



SPOT 4. 박천순대국 (since 1979)

: 이문환 3대 사장 & 고선화 2대 사장



북변동에서 ‘박천순대국’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동네의 많은 것들이 바뀌어가는 와중에도 39년 동안 그 자리에서 소뼈를 고아낸 뜨끈한 순댓국 한 그릇을 성실하게 내놓는 곳이기에 그렇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순대국의 레시피를 직접 전수 받은 이문환 3대 사장은 어머니인 고선화 2대 사장과 함께 가업인 이 가게를 이어가고 있다. 사람들이 이 가게를 찾는 이유에 대해 물었을 때, 40대의 젊은 사장은 ‘맛’과 더불어 ‘소통’이라는 의외의 답변을 내놓는다. 단순히 오랜 동네 맛집이 아니라, 사람이 모이고 음식을 함께 나누는 동네 사랑방이자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두텁게 쌓여온 공간을 지켜나가고 있다는 크고 단단한 마음가짐이, 그 말 한 마디에 오롯이 담겨 있다.





1대 사장님인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어 가업을 이어오고 계신데요. 혹시 맨 처음 순댓국을 팔기 시작한 특별한 계기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이북 평안북도의 남부에 위치한 ‘박천’이라는 지역에서 피난을 내려오셨어요. 이곳으로 피난 오셔서 장사를 시작하셨는데, 원래 팔던 메뉴는 순댓국이 아니에요. 어느날 팔던 국밥에 순대를 좀 넣어서 먹어볼까 해서 우연히 순대를 넣게 됐고, 그 모습을 본 손님들이 맛있어 보이니까 나도 맛보게 해달라고 했는데, 너무 반응이 좋았던 거죠. 그러니까 되든 안 되든 한 번 팔아보자 생각해서 팔기 시작한 순댓국이 인기가 좋아서 계속 순댓국 장사를 하게 된 거예요. 여기 문에 적힌 이름 보시면 아시겠지만, 원래 저희 가게 이름은 ‘박천식당’이었고 ‘박천순대국’이라고 이름을 정한지는 10년 정도밖에 안 돼요. 제가 원래 하던 일을 관두고 가게를 잇기 시작한지 10년 정도 됐거든요.


다른 가게와 다른 이곳 순댓국만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희 순댓국은 일반 순댓국하고 좀 달라요. 일반 순댓국은 육수를 우릴 때 돼지뼈를 가지고 우리거든요. 그런데 저희는 돼지뼈를 우리지 않고, 소뼈를 우려요. 그래서 저희 집 순댓국은 ‘국’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탕’에 가까운 맛을 내요. 그 외에는 다른 곳보다 양이 많고 푸짐하다는 점을 많이들 좋아해주시고요.





‘국’과 ‘탕’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우리나라 국물 요리에는 찌개, 탕, 국이 있거든요. 흔히 국은 깊은 맛을 내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진한 맛이 특징이에요. 하지만 탕은 맑고 개운한 게 특징이죠. 해물탕이나 설렁탕을 보면 국물이 대체적으로 진하지 않아요. 저희 집은 앞서 말했듯이 소뼈를 우리기 때문에 국물이 맑은데, 소뼈는 아무리 많이 우려도 국물이 진해지지 않아요. 돼지뼈를 우리는 순대국 집들은 뼈의 연골 부분의 콜라겐이라는 지방이 빠져 나오니까 육수가 진하고 걸쭉하잖아요. 간혹 손님 중에는 본인이 알던 국밥과 다르게 국물이 맑고 연하니까 오해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바로 그게 저희 집 순댓국만의 특징이거든요. 먹었을 때 개운하고 깔끔한 맛이 저희 집만의 특장점이자 차별점이라고 볼 수 있어요.


대를 이어서 오랫동안 가게를 운영해오고 계시잖아요. 사장님께서는 10년째 가게를 직접 운영하고 계신데, 어떻게 가업을 이을 생각을 하시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저는 오랫동안 건축을 배우고 그쪽에서 일해온 사람이에요. 교사를 하고 싶어서 교사 자격증까지 있고요.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해오던 가게가 없어진다는 게 안타까웠어요. 두 분이 해놓으신 업적이 너무 흐지부지 없어지는 것 같아서 제가 이 일을 책임지고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물론 어릴 때부터 여기서 자란 것은 맞지만, 가게를 잇겠다고 결심하고 나서부터 제대로 할머니 곁에서 조리 과정을 도우며 음식을 배우기 시작한 거죠. 제가 할머니께 직접 배운 거라 저희 어머니도 이 순댓국 못 만드세요. 할머니가 저를 칭찬해 준 건 성실하다는 것, 그거 딱 하나예요. 저를 포함해 손주가 7명이나 있는데다, 심지어 저는 외손주이거든요. 그런데도 제가 그동안 살아온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성실하다는 점을 믿어주시고, 얘한테는 가게를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하셔서 결국 제가 가게를 물려받게 된 거죠.





맛도 맛이지만, 이 가게가 동네 주민들에게 오랫동안 변함없이 사랑 받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연혁이죠. 오래됐다는 점에서 오는 신뢰요. 아시겠지만 음식 장사가 원래 오랫동안 버티기 쉽지 않아요. 10년을 하는 것도 긴 거거든요. 워낙 빨리 바뀌는 시대이기도 하고, 부동산 비용 문제라든지 세금을 감당해내기도 쉽지 않고, 특히 요즘에는 물가도 굉장히 많이 올라갔고요. 그런 것 때문에라도 오래된 음식점들을 보기가 쉽지가 않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장사를 했다는 게 손님들한테는 신뢰를 주는 거예요. 어쨌든 손님이 찾아왔을 때 그자리에 계속 있어주니까요. 또 손님들의 경우 가게에 얽힌 개인적인 추억들도 있을 거고요. 휴대폰이 없던 옛날에는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이 중요했어요. 그때 그 장소는 버스 터미널일 수도 있고, 마을 회관일 수도 있고, 학교 앞일 수도 있을 텐데, 이곳 사람들에게는 이 가게가 서로 만나는 중간 지점이 되어줬던 거예요.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마을 회관 같은 역할을 하는 거죠.


‘일종의 마을 회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이 이곳을 만나는 장소로 자연스럽게 여길 수 있었던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음식점이니까 여기서 만나자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오래 됐으니까. 사실 마을회관 같은 경우는 자리가 바뀔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희 가게는 1979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고 쭉 영업하고 있으니까, 여기서 만나자고 말하기 편한 거죠. “어디서 만날래?” 하면 “박천순대국 가 있어. 내가 갈게.”라고 이야기하고, 만나면 밥 한 끼 같이 먹는 거고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손님들에게 이 가게와 연관된 추억이 생기게 되죠. 꼭 음식만으로만 이렇게 유지되기란 쉽지 않아요. 사람들 사이에, 이 가게와 관련된 저마다의 스토리가 오랫동안 쌓여온 덕분이라고 봐요.






어릴 때부터 이 동네를 보고 자라셨을 텐데요. 오늘날 북변동의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궁금해요.

북변동은 지금 변해가는 시점이에요. 어떻게 되어 갈지는 모르겠어요. 동네가 재개발된다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아요. 어떤 것이든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나라에서는 건물 하나 부술 때도 무척 복잡해서 건물을 못 부수고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요. 오래된 건물들이 허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전통을 지킬 수는 있지만, 위생적으로는 조금 안 좋은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감수해야 하는 불편함도 있고요.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옛모습을 지키는 것보다는 새로 개발하기 바쁘죠. 편하고 깔끔하지만, 대신 역사도 없고 스토리도 없어요. 그런 부분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어느 쪽이 낫다거나 무엇이 옳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무엇을 먼저 추구하고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북변동이 변해나가는 과정에서 이것만큼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어떤 방향으로 개발이 되든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부동산적인 면으로만 접근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형성을 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많이 만드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어쨌든 만나야만 소통이 되니까요. 만나지 않으면 소통이 안 되잖아요. 만날 수 있는 공간을 통해 서로 이해를 하고 좀 더 나은 미래로 갈 수 있는 시발점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봐요.



#Editor’s Tip

김포의 동네 곳곳에 숨은 이야기를 제대로 경험하고 싶다면 두 가지 투어를 참여해보는 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어웨이크가 기획 및 운영하는 김포 북변동 로컬투어 <어서와 북변동>이 있다. 지역 활동가의 설명에 따라 김포 북변동 백년의 거리의 오래된 맛집,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 스팟, 골목과 다양한 가게에 얽힌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는 직접 걸어보며 경험 중인 북변동이라는 동네에 입체감을 더해준다. 지역 공방에서 북변동의 이야기가 담긴 체험 프로그램을 즐기거나 지역 독립서점에서 책과 함께 음료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야간 프로그램도 진행되는데, 프로그램에 대한 세부 사항은 인스타그램 어웨이크 뉴스(@awake_newss)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김포 군하리 만세로군하길에서 진행되는 <100년 나무의 비밀>은 오랜 시간 마을을 지키며 마을의 변화를 보아온 ‘100년 나무의 비밀, 아홉 그루 보호수 이야기’를 통해 잊혀진 마을, 군하리를 살펴보는 마을해설사 골목투어다. 군하리의 유구한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아홉 그루의 보호수의 이야기를 따라 통진향교, 통진이청, 군하숲길, 김포국제조각공원 등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들을 거니는 2시간 코스의 워킹 투어다. 가슴 아픈 근현대사 이야기부터 힐링 산책 코스까지 한 번에 즐길 수 있으며, 프로그램 진행 여부를 확인하고 싶다면 ‘김포 군하리 만세로군하길'을 검색하면 된다.


사진. 황지현

에디터

이지현

삶을 음미하며 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