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에 위치한 바닷마을 영화 서점, 이스트씨네
느슨한 마음을 위한 바닷마을 산책
여행을 자각하는 몇 개의 순간이 있습니다. 배낭을 메고 나와 설레는 마음으로 문단속을 하는 순간, 평소와는 다른 플레이리스트를 꺼내어 듣는 순간, 긴 터널을 빠져나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순간순간들. 오래 묵은 고민을 털어내기 위해 여행이 필요했고,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느슨한 공기로 가득한 바닷마을을 걸으며 그 산책의 끝에 영화 같은 순간이 찾아오기를 바랐습니다.
서울 사람 K가 찾은 곳은 강원도 강릉의 한적한 바닷마을 정동진입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여, 바닷마을에 있는 작은 서점 ‘이스트씨네’에 들를 예정입니다. 매일 일출 시간에 문을 여는 이곳에서 영화와 책, 음식이 결합된 패키지를 경험하려 합니다. 서울에 살던 부부가 왜 이곳 정동진에서 영화 서점을 운영하게 되었는지, 그 속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Step 1. 산책의 끝에 들어선 비밀의 공간
해변에서 5분 거리, 낮은 언덕을 오르면 멀리서도 눈에 띄는 건물 하나가 나타납니다. 이스트씨네는 지방 도시의 작은 극장을 연상케 합니다. 노란색과 파란색의 대비가 인상적인 외관, 브로드웨이의 소극장을 떠오르게 하는 빈티지 간판, 누구든 앉아서 쉬어 갈 수 있도록 놓아둔 소파. 영화관의 옷을 입은 서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소음은 차단되고 낮은 조도의 조명 아래 아늑하고 신비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Step 2. 누군가의 숨겨둔 아지트 여행
소설과 시집, 영화의 원작 작품이 꽂힌 책장과 오래된 비디오테이프, 음반들. 호스트가 좋아하는 물건으로만 가득 채운 이곳은 누군가의 숨겨둔 아지트 같습니다. 시간마저 멈춘 듯한 공간에선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구석구석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서점을 구경합니다. 주문 제작했다는 극장 의자에는 호스트가 좋아하는 여성 감독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부터 임순례, 전고은 등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이들의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하며 어떤 단단한 유대감에 대해 생각합니다.
Step 3. 온전한 감상을 위한 가이드
호스트 오승희의 영화 소개가 이어집니다. 한때 영화 치료를 공부했던 그녀의 가이드는 일종의 애피타이저 같습니다. 영화 속 배경 설명과 숨겨진 이야기들은 무엇에 초점을 두고 영화를 감상하면 좋을지 훌륭한 안내서가 되어줍니다. 프로그램을 위해 준비한 영화들은 모두 ‘여행’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있습니다. 비밀의 공간에서 마주하는 여행 이야기라니, 아직 영화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설레는 기분입니다.
Step 4. 오롯한 혼자만의 영화 감상
오늘 체험할 프로그램은 ‘세 가지 색 시네마: BLUE’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열 번째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로 네 자매의 끈끈한 연대를 다루는 가슴 따뜻한 작품입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가마쿠라는 바다와 언덕, 인도를 통과하는 기찻길, 야트막한 뒷산과 작은 항구까지, 여러모로 정동진의 풍경과 닮았다고 합니다. 영화가 끝나면 그 잔상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동네를 산책해야겠습니다.
Step 5. 영화 속 음식 맛보기
아버지가 해주던 잔멸치 밥, 할머니의 어묵 카레, 가족이 함께 만드는 매실주.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영화 속 인물들의 추억이 담겨 있는 음식을 맛보게 됩니다. 모든 음식은 강릉 지역에서 나는 식재료를 사용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영화를 단순히 보고 듣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각의 영역까지 확장하자, 영화를 감상하는 경험의 깊이가 한층 깊어지는 느낌입니다. 훗날 누군가 영화에 대해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영화는 아주 따뜻하고 담백한 맛이었어.”
Step 6. 나를 알아가는 대화의 시간
좋은 청자가 좋은 대화를 만듭니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 호스트와 나눈 짧은 대화가 오래 기억에 남는 건 바로 그녀가 ‘잘 들어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대개 영화의 감상을 이야기하거나 함께 곁들인 음식의 감상을 말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더러는 영화를 보며 생각났던 자신의 경험이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답니다. 저 역시 영화 속 인물들의 상황에 이입해, 오늘의 고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귀기울여 듣더니 저를 위한 작품을 추천합니다.
Step 7. 다음 여행자를 위해 짧은 글 남기기
모든 체험이 끝나고 한쪽에 마련된 방명록을 열어봅니다.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글을 찬찬히 읽고 있자면, 마치 결이 맞는 여행자들이 함께 만드는 책 한 권을 읽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아는동네’ 카드에 오늘 경험에 대한 감사의 인사와 나만의 작품을 찾은 기쁨, 내일의 약속들을 적었습니다. 누군가 제가 이곳에 남긴 흔적을 찾아준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여행자를 위한 환영의 인사를 적어주세요.
이스트씨네, 영화로운 바닷마을의 아침을 여는 두 사람
이스트씨네는 서점 지기 오승희, 빵 짓는 박일우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영화 서점입니다. ‘영화로운 아침, 영화로운 바다’라는 슬로건이 말하듯, 2020년부터 꼬박 2년간 매일 아침 정동진의 일출과 함께 문을 열고 있습니다. 편집디자이너 출신 오승희가 공간의 호스트를 맡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박일우는 천연 발효종을 이용해 매일 아침 따뜻한 빵을 구워냅니다. 그들이 정동진을 선택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독립 예술 영화관이 있을 것, 깨끗한 자연을 느낄 수 있을 것, 늘 여행하는 기분이 드는 곳일 것. 자기가 원하는 삶을 선택하는 용기, 그 용기의 근원에 대해 그들은 영화의 대사를 빌어 말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뿐이에요.”
영화 <카모메 식당> 중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서점 지기 오승희, 빵 짓는 박일우입니다. 영화 큐레이션과 프로그램 호스트 역할을 하고, 짝꿍은 빵을 만들면서 동시에 청소를 담당하고 있어요. 저희는 결혼한 다음 해에 서울에서 동네 책방을 운영했어요. 그때 경험했던 운영과 기획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곳, 정동진에 영화 서점 이스트씨네를 만들게 됐죠.
정동진에 공간을 꾸린 계기는 무엇인가요?
저희가 영화를 좋아해서 ‘정동진영화제’도 종종 다녔는데요. 새벽에 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내리면 마땅히 갈 곳이 없는 거예요. 그때 ‘이런 곳에 고소한 빵 냄새가 풍기는 곳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동진에 대한 좋은 추억으로 이곳에 터를 잡기로 계획했는데, 비건을 지향하기로 마음먹은 뒤로는 빵을 굽는 데 버터를 사용할 수 없게 됐어요. 덕분에 빵 냄새가 나는 공간 콘셉트는 포기해야 했네요(웃음).
영화 서점이라는 독특한 콘셉트가 흥미로운데, 이스트씨네는 어떤 곳인가요?
말 그대로 영화와 책이 함께하는 곳이에요. 저희는 이곳이 분주한 여행지에서 잠깐 멈춰 쉴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해요. 누군가는 이곳에서 운명 같은 책이나 영화를 만날 수도 있겠죠.
주로 어떤 책을 다루나요?
영화 서점이다 보니 영화 원작인 작품을 주로 다뤄요. 영화를 보고 그 원작을 함께 읽는다면 더 풍성한 경험을 할 수 있거든요. 또 강릉 지역을 소개하는 책이나 환경, 비건, 동물권 등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주제도 함께 준비했죠. 다만 공간의 한계가 있다 보니 큐레이션을 조금씩 다르게 가져가고 있어요.
일출 시간에 맞춰 문을 여는 이유가 있나요?
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도착하는 여행자가 많아요. 일출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을 때 머물 수 있는 공간, 혹은 일출을 보고 난 후의 여운을 떠나보내기 싫은 여행자들을 위한 공간이었으면 했어요. 매일 아침 출근 도장을 찍듯 오픈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데, 그 꾸준함에 힘을 받고 가시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감사한 일이죠.
이곳을 거쳐 간 게스트 중에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나요?
우연히 알게 됐다며 따님을 위해 스테이를 신청해 주신 어머니가 계세요. 그 후에 따님의 좋았던 경험을 듣고 이번엔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가셨죠. 제 개인적으로는 따님과 어머니 둘 모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또 강릉에 사는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도 기억에 남아요. 항상 부모님의 차를 타고 들르곤 했는데, 한 번은 강릉 시내 영화관에서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나게 됐어요. 반가운 마음에 스테이에 초대했죠. 2박 3일을 머물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기억이 나요. 함께 영화를 보고 고민도 이야기하면서 친구가 됐죠. 어쩌면 그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저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또 다른 누군가와 이런 경험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서점이라는 작은 공간을 생각하면 지속 가능함에 대해 고민하게 돼요. 힘들진 않은가요?
사실 서울에서 서점을 할 때는 경제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관계의 고달픔도 늘 있었어요. 그런 점에서 서울의 속도보다는 정동진의 속도가 저희와 맞아요. 해가 지면 하루를 마무리하는, 순리에 맞게 살아가는 삶이요. 아무래도 정동진은 여행지인 만큼 사람들과 너무 끈끈하거나 파편적인 관계보다는 조금 더 느슨하고 편안한 관계를 맺게 돼요. 그들을 보며 저희 역시 여행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결국 지속 가능함이란 공간이 사라진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가 아니더라도 계속 이어지는 삶을 말하는 거겠죠.
정동진의 속도라는 말이 좋네요. 이곳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우선 정동진은 공기가 좋아요. 미세먼지도 없고 기후도 온화해서 주위에 식물이 많죠. 저희 부부는 자가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역을 이동하는 데 큰 어려움을 못 느껴요. 기차와 버스 같은 대중교통 시설이 좋거든요. 무엇보다 정동진은 번잡하지 않은 관광지예요. 가까운 강릉에 비해 사람이 적어서 ‘쉼’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는 한적함이 있죠.
이스트씨네의 분위기를 한 편의 영화로 비유할 수 있을까요?
<안경>이라는 영화를 꼽고 싶어요. 낯선 지역에 간 주인공이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다시 천천히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채거든요. 그러한 취향이 결이 비슷한 분들과 함께 이야기 나눌 때 서로 힘을 주고받게 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