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리노베이션 스쿨 in Jeju - Context (이전 글)
앞선 글에서는 제주창조혁신센터, 제주 도시재생지원센터를 필두로 하는 관련 주체들이 제주시 원도심에서 창업 생태계 조성을 통한 도시재생을 모색하게 된 배경에 대해 소개하였다. 제주시 원도심은 2018년 현재 다양한 도시문제로 인해 신음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랜 기간 축적해온 역사-문화적 자산이 지닌 잠재력 역시도 함께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이번 프로그램의 기획과 운영에 참여한 일본 지역 매니지먼트 스타트업 ‘리노베링’은 한국보다 앞서 유사한 도시 문제를 겪어온 일본에서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를 전개해왔다. 이들이 역설하는 리노베이션이란 간단히 설명하자면 낙후 지역의 유휴공간을 새로운 용도로 활용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지역 재생에 힘을 보태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리노베링은 이를 ‘리노베이션 마치츠쿠리’로 표현하는데, 직역하자면 ‘리노베이션을 통한 지역 만들기’란 뜻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리노베이션은 무엇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되는 것일까?
리노베이션 프로젝트 거점 도시 중 한 곳인 기타큐슈
Renovation! Why? How?
리노베이션은 지역 내에 이미 존재하는 요소를 새롭게 활용하여 지역을 바꿔나가는 작업이다. 지역 내에 이미 존재하는 요소를 활용하는 배경에는 일본의 사회-경제적 급변이 영향을 미쳤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지자체 및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지역 재생을 전개해왔던 일본은 경제 고도 성장기의 종결과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인구 절벽 등 급속한 사회 변화를 겪었다. 이는 지역 재생을 주도해왔던 지자체의 세수 급감으로 이어졌고, 기존과 같은 지역 재생 방식은 한계에 부딪혔다.
유닛 마스터 오오시마 요시히코 씨가 이끄는 blue studio의 리노베이션 사례인 ‘SodaCCo’
40년 된 빌딩을 새로이 꾸며 어린이와 크리에이터를 위한 공유 공간을 만들었다.
ⓒ blue studio co.
리노베이션 마치츠쿠리는 이와 같은 사회적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응하여 새로운 형태의 지역 재생을 주창하고 있다. 공공 주도로 지역 재생을 전개해왔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이제는 민간 주도로 지역 재생을 추진하고 공공 기관은 이를 행정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유휴부동산을 공간 자원으로 삼고 잠재적인 지역자원을 조합하여 수익성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한 공간 운영 프로젝트를 전개한다. 그리고 이러한 리노베이션은 보조금이나 지원금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도시 및 지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파급력 있는 프로젝트 운영을 지향한다.
이와 같은 리노베이션의 운영 방식 및 선례를 더욱 다양한 지역으로 확산하려는 취지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바로 ‘리노베이션 스쿨’이다. 리노베이션 스쿨은 실제 다양한 사회 문제를 겪고 있는 지역 내에 위치한 유휴공간을 대상으로 실현 가능한 리노베이션 방안을 기획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직관적인 이해를 위해 비유하자면 케이스 스터디 및 해커톤의 방법론이 지역 혁신 분야로 이식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리노베이션 스쿨 in Jeju
‘리노베이션 스쿨 in Jeju’는 7월 5일부터 7월 8일까지 3박 4일간 제주 원도심 내 네 곳의 유휴공간을 대상지로 삼아 진행되었다. 개별 대상지는 성격, 규모, 특성에서 큰 차이를 보이며 각각 맞춤형 리노베이션 방안을 개발할 필요가 있는 공간들이다. 참가자는 대상 공간에 따라 나뉜 유닛 소속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하였으며, 각 유닛에는 리노베이션 경험이 풍부한 일본인 및 한국인 유닛 마스터가 배정되어 리노베이션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개발하는 과정을 도왔다.
리노베이션 스쿨의 세부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 에리어 리서치(대상 건물 견학)
유닛별로 대상 건물을 방문하여 입지, 시설의 특성을 살피고, 건물주와 소통하며 리노베이션 기획을 위해 사전 정보를 취득하는 시간이다. 특히 건물주와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참가자들은 건물의 내력과 특성을 상세히 파악했고, 건물이 유휴공간으로 남게 된 실질적인 원인을 분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파트너인 건물주가 희망하는 리노베이션 방향을 경청한다는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리서치 범위를 대상 건물로만 한정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리노베이션의 취지 및 특성상 지역과의 유기적인 연계가 이뤄져야 사업 아이템이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노베이션 스쿨 in Jeju의 에리어 리서치는 지역 내 거점 시설이라 할 수 있는 동문시장, 칠성로까지 아울러 대상으로 삼았다.
● 유닛워크
리노베이션의 구체적인 방안을 개발하는 과정이다. 유닛 구성원은 공간과 지역에 대한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상호 토론을 거듭하며 적합한 사업 모델을 개발해 나간다. 최종 프레젠테이션 전까지는 유닛워크와 라이브 액트, 그리고 중간 결과를 발표하는 쇼트 프레젠테이션이 교차 진행되어 아이디어를 거듭 수정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유도한다. 유닛 마스터들은 참가자들의 아이디어 개발이 리노베이션 취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함께 토론하며 조언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 라이브 액트
지역 혁신 비즈니스 경험이 있는 연사가 본인의 사례를 참가자들에게 소개하는 시간이다. 연사는 세부적인 실행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PT를 통해 소개했고, 참가자들은 이를 경청하고 궁금한 점을 묻기도 하며 기획 과정에서 도움이 될만한 인사이트를 얻었다.
필자는 일본인 유닛 마스터 오오시마 요시히코 씨의 라이브 액트를 취재했는데, 얼핏 당연해 보이지만 허를 찌르는 내용을 다수 들을 수 있었다. 다음에 열거한 내용은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정리하여 요약한 것이다.
▷ 리노베이션 대상 공간과 상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주변 지역의 범위를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너무 광범위하게 설정하면 실질적인 분석이 어렵고, 좁게 설정하면 공간의 잠재 가치를 낮춰 보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실증적인 분석을 통해 구체적인 구역을 특정할 필요가 있다.
▷ 사업 아이템을 탄탄히 구성하는 것은 당연히도 중요하지만, 단위 지역의 특성을 파악하고 해당 특성이 공간에 미칠 영향, 공간이 주변 지역에 미칠 영향 등을 총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특히 주변 지역에서 기존에 원활히 작동해왔던 요소(ex. 시장, 상점, 공원 등)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 서비스의 개념이 빈번하게 바뀌는 시대이므로 방문객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만약 물리적인 시설이 비교 우위에 서지 못한다면, 어떻게 차별화되는 경험을 제공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 건물주와 임대인의 관계를 기존의 프레임으로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본에서는 공간 운영을 통해 발생한 수익 일부를 건물주와 공유하는 계약을 맺어 임대료를 대체하는 경우, 또는 건물주가 임대인의 아이디어를 높게 평가하여 투자자로 참여하는 경우 등 통념적인 임차 관계를 넘어서는 다양한 사례가 존재한다.
▷ 진정한 리노베이션을 이끌기 위해서는 방문객이 머물며 사회적인 임팩트를 만들 수 있도록 유도하는 운영 방식이 필요하다.
▷ 공공성과 수익성은 상반되는 가치가 아니다. 공공적인 가치를 실현하면서도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설계하라.
● 프레젠테이션
쇼트 프레젠테이션은 중간 점검 개념으로 2일 차, 3일 차 각 1회씩 진행되었다. 리노베이션 스쿨 참가자 및 운영진 전체가 배석한 가운데 각 유닛은 발표 시점을 기준으로 정리한 아이디어를 소개했고, 이에 대한 피드백을 들었다. 발표와 피드백은 모두 다음 사항을 점검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 기획한 사업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합리적인가?
– 사업 형태는 대상 건물의 특성에 부합하는가?
– 사업 방식은 주변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였는가?
–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했는가?
– 사업 아이템은 리노베이션 추진 주체, 공공기관, 지역민의 수요를 모두 충족하는가?
프로그램 전체를 마무리하는 최종 프레젠테이션은 유닛별 최종 기획안을 발표하는 자리다. 현장에는 대상 공간 건물주가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 혁신에 관심이 있는 건물주, 지역 재생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 관련 분야에서 명망이 높은 사업자 등이 두루 참여했다. 이들은 리노베이션 사업 아이템에 대한 평가 및 피드백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향후 지역의 발전 방향성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의견을 나눴다.
ⓒ 산지놀지
지역 혁신, 그 도도한 물결의 시작
리노베이션 스쿨 in Jeju를 통해 기획된 프로젝트는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를 비롯한 관계 기관의 협력과 참가자, 주민의 주도 아래 실행으로 옮겨지고 있다. 실제로 개별 건물이 아닌 ‘산지천 일대 공원 시설’을 대상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한 ‘산지놀지’ 유닛은 이미 올 8월부터 산지천 일대에서 매달 지역 주민이 주도하는 놀이 이벤트를 진행해오고 있다.
나아가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는 앞선 글을 통해 소개한 대로 리노베이션을 통한 지역 혁신의 확산을 도모한다. 이를 위해 센터 측은 지역의 가치를 높이는 데 뜻을 두고 있는 부동산 소유주, 공공 재원에 의존하지 않는 주체적인 자세로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지역 혁신 스타트업, 그리고 지역에서 새로운 사업을 고안하고 전개할 수 있는 경험 많은 사업가 등 주요 주체 사이에서 커뮤니케이션 조정자 겸 행정적인 조력자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J-Connect Day – Click!>
같은 맥락에서 오는 11월 8일부터 11월 10일까지 ‘사람을 닮은 지역의 변화, 원을 만들다’란 타이틀로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주최하는 J-Connect Day는 주목할만하다. 국내외에서 지역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지역 혁신가를 한자리에 모아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여 혁신창업생태계를 만들고자 기획된 이 행사는 향후 제주 지역에서 전개될 지역 혁신의 방향성은 물론 전국 각지 지역 혁신의 현주소를 짚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행사가 될 것이다.
※ J-Connect Day 일반 참가 신청은 공개와 동시에 마감되었으며, 행사 내용은 사후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제작할 예정인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제주에서 일렁이기 시작한 지역 혁신의 물결은 과연 바다 건너 육지에 닿을 즈음 거센 파도가 될 수 있을까? 전국 각지에서 ‘로컬’을 화두 삼아 지역 고유의 콘텐츠를 탐구하는 이가 하나둘 늘어나고 있는 2018년. 수천 년에 걸친 역사와 지리적인 조건을 기반으로 선명한 지역색을 쌓아온 제주가 색다른 상상력으로 육지 사람들을 놀라게 할 날이 어쩌면 머지않았을지도 모르겠다.
※ 참고자료
2018 혁신 창업 생태계 조성과 도시재생 제주 콜로키움 결과자료집,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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